작년 요맘때쯤 저는 <이런 얘기 하지 말까?>라는 에세이집을 냈는데(벌써 1년이 흐르다니!), 그 책에는 ‘우엉의 친구들’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요. 한 여성단체에서 회원들에게 보낸 활동보고서 속 후원인 명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나다순으로 적힌 수많은 사람의 이름, 노동조합, 학원, 카페, 여기저기의 페미니즘 동아리와 모임, 형편이 고만고만할 다른 여성단체들, 그리고 정체가 궁금해지는 다양한 별명들 틈에서 ‘우엉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몇 년 전부터 저는 몇몇 단체와 작은 언론사에 정기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정치권과 보수 언론에서는 종종 시민단체를 싸잡아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처럼 몰아가지만, 막상 어떤 이슈나 운동에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는 단체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항상 그 단체들이 무슨 돈으로 먹고사는지가 걱정이었어요. 그건 제가 늘 작은 회사에 다니며 우리의 수익과 지출과 지속가능성을 고민했던(그리고 여러 번 실패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죠. 사무실 임대료, 통신비, 전기세, 냉난방비, 상근활동가 월급, 집회에 나가 인쇄물을 배포하려 해도, 현장 발언을 위해 앰프를 빌리려 해도, 간담회를 열려고 해도, 회원들에게 소식지를 보내려 해도, 신입활동가를 뽑아 교육하는 데도 다 돈이 듭니다. 무엇보다 운동을 지속하면서 장기적 미래를 내다보려면 가용 예산을 미리 가늠할 수 있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목표는 비록 소액이라도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계속 정기후원을 유지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변영주 감독님을 인터뷰했을 때 수많은 단체와 지역 영화제, 극장 등을 후원하는 마음에 관해 여쭤본 적이 있어요. 감독님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세금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종합소득세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국가가 게을러서 미처 걷지 못하고 있는 걸 내가 미리 내는 거라고.”

저 역시 정기후원액은 세금이나 통신비, 관리비처럼 매달의 기본적인 지출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정기후원하지 않는 단체나 한시적 이슈에 관한 활동에 일시후원을 하게 될 때는 조금 손이 떨리곤 했습니다. 생활의 규모가 작은 만큼 지출도 적은 편이지만 소득도 워낙 적다 보니 ‘지금 후원금 낼 때가 아니라 노후를 위해 만원이라도 더 아껴야 할 때 아닌가? 이 정도의 후원은 나에겐 사치인가? 아니,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하는 내가 문제 아닌가?’ 같은 불안과 자책이 마음을 짓눌렀거든요.

게다가 저는 얼마 전 ‘<없는 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 페이지를 읽다가 혼자 크게 웃은 적이 있는데, ‘에스뗄라’ 님께서 적어주신 이 문장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어요.

“딩크(Double Income, No Kids)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반려인과 저는

‘우리는 링크(Low Income No Kid)’라고 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짓습니다. 😂”

그렇습니다. 저 역시 딩크가 아니라 링크였던 것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없는 생활> 덕분에 저는 전보다 조금 더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편지 하단에 후원 계좌를 적은 건, 사실 별 기대는 없었고 다른 뉴스레터들의 형식을 따라 해 본 거였어요. 그런데 제 친구들, 랜선 너머로만 이야기 나눠본 분, 낯선 이름, 그리고 ‘인생은 디스코팡팡’이나 ‘삽질하는 조용한 오타쿠’ 같은 별명이 하나씩 찍힐 때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기뻤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혼자 보내는 편지에 답장을 받은 것 같았거든요. (물론 답장과 사연도 늘 환영합니다. 하루에 열두 번씩 새로고침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폭력 사건 피해생존자 분의 소송비용을 모금한다는 글을 보고 문득 ‘아, 이번 주 후원금을 보내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체하면서 든 감정은 그 전 같은 불안이나 자책이 아닌 일종의 가뿐함이었어요.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돈을 잠시 맡았다가 필요한 곳으로 전달하는 기분 같았거든요. 제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글을 쓰고 그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인데, 이 편지만은 제가 당사자와 잘 협의해 원고료를 받지 않기로 했는데도 수입이 생기다니 횡재한 느낌이었죠.

그래서 저는 여러분 덕분에 다음과 같은 곳에 조금씩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클릭하시면 단체 홈페이지나 관련 기사가 뜹니다.)

-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

-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 반지하 주택 침수 피해 사망자 조의금

- 2022 제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

- 십시일반 밥묵차

-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 진보적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정직당한 이동환 목사 후원

- 빈곤사회연대

- 화물연대 파업투쟁

-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투쟁

- 10.29 이태원 참사 49일 시민추모제

언젠가 이 중에서, 혹은 다른 곳으로 정기후원처를 더 늘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연말을 맞아 새로운 후원처를 찾고 계신 분들이 관심 갖거나 함께해주셔도 반갑겠습니다. 참, 전부 여기에 전달한 건 아니고 어느 날엔 떡볶이도 사 먹고 커피도 사 마시고 다른 뉴스레터 구독료도 냈답니다. 저의 ‘우엉의 친구들’이 되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에는 눈이 무척 많이 온 하루였습니다. 사람도, 자동차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제 기말 과제가 첩첩산중입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