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1. 만화방 2. 도서관입니다. (0. 집이죠.) 물론 사람이 책을 샀다고 해서 다 읽는 건 아니듯, 도서관을 좋아한다고 해서 책을 많이 읽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냥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좋다는 얘기죠.

제 또래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손에 넣기 전, 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저는 활자중독자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땐 세상의 거의 모든 재미가 책에 있었거든요. 텍스트 소화 능력도 왕성했던 시절이라 저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헤매곤 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공부보다 책을 좋아하는 걸 반기지 않으셨고, 저는 공부하러 가는 척 도서관에 가서 몰래 책을 읽었습니다.

얼마 전, 저의 첫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30년 넘게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이 도서관에 마지막으로 간 건 2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학교 도서관에 갔고 그 후에는 회사에서 가까운 도서관, 지금은 집에서 더 가까운 구립 도서관을 주로 이용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도서관은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무렵까지 다니던 곳인데, 절판된 책이 필요해서 찾다가 마침 그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 나가 버스를 타고 여섯 정거장을 간 다음 내려서 다시 8분쯤 걸으니 낯익은 건물이 보였습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종 즉석떡볶이를 사먹었던 골목 안 분식점은 이제 사라진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요. 경비실이 있던 자리는 스마트도서관으로 바뀌었더군요. 예전엔 입장할 때 종이에 이름과 학교를 적어서 냈던 것 같은데, 그게 마치 놀이공원 티켓을 끊고 들어가는 것처럼 흥분되는 순간이기도 했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도서관 건물은 그대로였습니다. 아니, 그대로인데, 조금 작아진 것 같기도 했어요. 자료실에 들어서니 조용한 음악이 흘렀고, 서고에 있는 책을 요청할 방법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는 저에게 사서 분이 미소를 지으며 뭐 필요한 게 있냐고 말을 건네셨어요. 책을 기다리는 동안 저는 잠시 서가 사이를 돌아다녔습니다. 읽지 않은 책, 새로운 이야기가 가득해 마치 부자가 된 것 같던 공간에서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처음 읽은 건 이 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에서였어요. 옷장 안에 있는 문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가서 만나는 모험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그 책이 <나니아 연대기>라는 시리즈의 첫 권이라는 사실을 안 저는 나중에 번역가가 되어서 꼭 다음 이야기를 읽고 직접 출판하겠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저는 영어 문장만 보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어른이 되었지만요.

중학생이 된 뒤로는 어린이 자료실을 벗어나 일반 자료실 책을 읽었어요.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괜히 눈치를 보며 <혼자 뜨는 달> 같은 성인소설이나 <세계 미스터리 단편선> 같은 범죄소설을 몰래 읽었고, 그냥 눈에 띄는 아무 책을 꺼내 읽기도 했습니다. 어른의 추천이나 지도, 사전 정보 하나 없이 이루어지는 독서라는 건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요. 그런 우연 덕분에 저는 피임 운동의 선구자 마거릿 생어나 독재정권에 맞서다 순교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처럼, 한국의 평범한 중학생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의 삶과 갑자기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 책들이 제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바꿨을 리는 물론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래알 같은 순간들이 조금씩 쌓여 지금의 저라는 사람을 만든 것도 사실일 거예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지면 지하 식당에 가서 라면을 사 먹는 것도 특별한 이벤트였습니다. 하얀 플라스틱 대접에 담긴, 살짝 불어 있는 라면과 단무지 몇 개가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모처럼 그 라면을 먹고 싶었는데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식당은 영업을 중단했고 사람들은 각자 도시락이나 컵라면을 가져와 먹고 있더라고요. 어르신 한 분이 컵라면에 물을 부어 들고 들어간 식당 옆 경로실 유리문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이 누군가의 붓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지하에 내려간 김에 연결된 정원으로도 나가보았어요. 친구들 여럿과 도서관에 왔던 날 신나서 뛰어놀다가 시끄럽다고 사서 선생님께 쫓겨날 뻔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평일 낮이라서인지 어린이들은 없고, 벤치에 드문드문 청년과 중년과 노인들이 앉아 있었어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아 바깥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고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료실과 비슷한 분위기의 그 차분함이 저는 무척 좋았습니다. 아마도 도서관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소통할 수 있는 아주 드문 공간이 아닐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제가 기억하는 공간이 계속 그 자리에 있어 준다는 건 생각보다 더 고마운 일이더라고요.

자고 일어나면 기습하듯 꽃이 피어 있는 요즘입니다. 오늘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은 버스를 타고 가며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을 보았을 때였어요. 사실 이 계절에 제가 꽃만큼이나 좋아하는 건, 꽃이 핀 가지 앞에 까치발로 서서 더없이 신중하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수원 행궁동 칼국수 맛집 추천해주신 조조 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