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없는 삶에 현재로서는 만족하고, 혹시나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100% 확신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고 믿으며 이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40대 초반의 직장인입니다. 사실 주변에 결혼하지 않은 친구도, 아이 없는 기혼 친구도 꽤 많아서 선택 자체에 불안감이나 소외감을 느끼는 일은 잘 없어요. 저의 고민은 아이가 없는 ‘대신’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멀리, 또 가까이 있는 사례를 보면 아이가 없는 분 중엔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루신 분들이 많아요. 누가 봐도 아, 저렇게 바쁘고 대단한 사람은 당연히 아이를 낳고 키울 시간이 없었겠지, 저 정도의 성공이라면 당연히 뭔가를 희생할 가치가 있었겠다, 싶은 느낌으로요.

제가 그런 사례만을 인상 깊게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친구들과 비교하면 제가 너무 인생을 쉽게 쉽게, 헛되이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종종 듭니다. 실제로 육아를 하면서 직장도 다니는 친구들에 비하면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요. 세상에 인생을 어떤 강도로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공이나 성취라는 게 이런 막연한 욕망이나 허영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자괴감과 공허함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분명 어딘가엔 계실 것 같아 저의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ㄱ] 

ㄱ 님의 편지를 받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제가 바로 같은 고민을 해온 사람이라서요. 저도 지금까지는 아이 없는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이제 이 결정에 대한 불안감도 거의 사라진 데다 인간관계에서 딱히 소외감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는 ‘대신’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 이게 뭔지 너무 잘 알겠거든요!!!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쓰기 위해 아이 없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을 때, 어느 분께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어요. “아이 없이 사는 미래보다 궁금한 건, 아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가예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자유가 제일 소중한데, 계속 이렇게만 살면 내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지? 계속 딜레마에요. 아이가 있든 없든 다들 이런 고민은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아이 없는 쪽을 선택했으니까요.” 그때 저는 그 고민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로부터 2년 가까이 흐른 다음, 제가 그때의 그분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던 게 바로 이런 감정이구나….

책을 준비하고 쓰는 동안에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분명했어요. 뭐가 됐든 이 이야기만큼은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그 일을 마치고 나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몇 년 전 직장을 그만둬서 이미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상태였는데도요. 문제는 제가 굉장히 게으른 사람이면서도(게으름은 제가 아이를 갖지 않는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나의 비생산성을 견디기 힘들었다는 점이었어요. 아이도 키우고 일도 하고, 때로는 공부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왜 이렇게 느슨하게 살까 하는 생각을…저도 자주 했고 지금도 합니다. 누군가 2.5인분의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내가 선택한 1인분의 삶 정도만 대충 꾸려가면 되긴 하는데 그걸로 괜찮을까 하는 죄책감과 불안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든요. 사람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도 될까, 내 또래 아이 있는 사람들에 비해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있긴 한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하지?

세 번째 책 <이런 얘기 하지 말까?>를 쓰고 나자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쓸 이야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도 쓸 수 없다면 내 인생의 의미는 어디 있지? 아니, 내 인생이 뭐지? 점심 무렵 일어나서 소파에서 반나절을 보낸 뒤 저녁 먹고 다시 소파에서 스마트폰과 TV 채널 사이를 오가기? 인생이 이렇게 텅 비어 있어도 되나?

사람은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면 우울해진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결과, 공부와는 담을 쌓은 제가 덜컥 대학원에 와 버린 것입니다…. 대학원 생활은 대부분 괴롭고 조금 즐겁기도 하고, 어쨌든 매주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고 감당할 수 없는 과제들이 쏟아지다 보니 인생의 의미 같은 걸 생각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졸업(할 수 있다면) 이후로 그 문제를 유예해두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만화 <순정 히포크라테스>(골드키위새, 카카오 웹툰)를 다시 보다가 이런 대사를 발견했어요. “스스로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외부의 것들이 널 잡아놓을 수 있게라도 만들어.” 아마도 그래서 저는 1년 전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원에 등록한 것 같아요. (둘 중 하나만 할 걸 그랬죠.)

제가 이번 학기 시작과 동시에 공부를 그만두고 싶다고 울부짖을 때 한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어요. 아이 없는 사람 가운데 대학원에 갔다가 도중 하차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정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다고요. 그 얘기를 듣자 문득 웃음이 났습니다. 이런 삶 안에서 헤매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ㄱ 님이 쓰신 “은은한 자괴감과 공허함”이라는 표현이 너무 반가웠어요. 사실, 아이 없는 삶이라는 게 아무 걱정 없고 고뇌 없는 삶이라는 의미는 아니긴 한데, 이건 40대에 접어들며 닥쳐오는 감정과 고민 같기도 합니다. 아주 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은퇴하기엔 한참 남은 나이… 내 인생에서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데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나이… 나 말고 남들은 가장 왕성하게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 같은 나이…

그런데 저는 정신승리의 왕이라서, 나 자신과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고,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인생을 이렇게까지 낭비하는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받아들이자고 종종 다짐하거든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금의 삶의 모습을 갖고 유지하기 위해 해온 선택들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40대는 그 선택들의 토대 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일상을 보내는 나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시 불안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40대에 막 들어섰을 무렵, 아이 없는 또 다른 친구가 식물을 기르면서 느낀 감정을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성장이 빨라서 가지치기를 해줬는데, 자식(없지만) 이발해주는 것처럼 왠지 뿌듯하고 서운하더라.” 저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런 감정은 어떻게 느끼게 되는 건지 물었는데, 그때 친구가 해준 말이 어쩐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긴 인생을 살아가려면 인간은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내가 아직도 평균 수명의 반 정도밖에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이 긴 인생에서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할지 막막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다는 걸 느낄 때마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데서 모든 게 시작되지 않나 생각해요. 내가 인생을 너무 헛되이 흘려보내고 있는 걸까 고민해오신 ㄱ 님 역시 이미 한 사람 몫의 삶을, 그리고 누군가의 동반자로서의 삶 역시 잘 살아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니 자신을 너무 재촉하지 말되, 우리가 가진 상대적 여유를 어떻게 의미 있게 쓸 수 있을지 계속 찾아보도록 해요.

<없는 생활> 다음 호는 저의 산더미 같은 기말 과제 때문에 6월 15일이 아닌 22일에 발행됩니다. 3주 뒤에 만나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