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금 사는 동네에 관한 글을 한 편 썼습니다. 그런데 30년 넘게 산 이 동네 얘기를 쓰다 보니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고요. 전에도 얘기한 적 있지만, 저는 열한 살 때 안산에서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경기도와 서울은 아주 먼 거리가 아니지만 전에는 대중교통이 지금만큼 편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서울 나들이는 훨씬 각별하게 느껴졌어요. 작은 우리 동네를 벗어나 큰 건물과 신기한 볼거리가 많은 대학로나 여의도에 처음 갔을 때의 인상은 조각조각으로나마 생생하게 남아있거든요.

어째서 제가 그 날 서울에 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라서였을까요? 엄마는 모처럼의 외출에 저만 데리고 나서셨어요. 버스와 지하철을 서너 번 갈아타는 여정이었을 겁니다.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어느 경양식집의 방에 엄마와 엄마 친구 네댓 명 사이에 제가 앉아 있던 장면이에요. 그건 엄마의 여고 동창 모임이었습니다. 전북 익산에서 나고 자라 그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각자의 삶을 꾸려가던 여자들이 큰맘 먹고 서울에서 모였던 거죠.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도파민 중독자가 되었지만, 어릴 때 활자중독자였던 저는 책 한 권 없고 뒤적거릴 신문조차 없는 공간에서 모르는 어른들에게 몇 시간이나 둘러싸여 있는 게 정말 지루했어요. 그런데 엄마와 친구들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그 얘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딱 한 대목만이 기억납니다.

“고등학교 때 내가 뭔 겉멋이 들었는지 학교에서 맨날 ‘나는 요절하고 싶다. 서른 살 되면 딱 죽어버릴라고.’ 그러고 다녔거든. 근데 어느 날 그 얘길 들은 ㅇㅇ이가 눈을 시퍼렇게 뜨더니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살다 죽어! 자식새끼 가슴에 못 박지 말고!’ 그러는 거야. 생각해보니까 걔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게 그렇게 마음에 남았었나 봐….”

그때 엄마 친구들의 나이는 서른 대여섯쯤, 거의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을 때였어요. 자신들이 추억하는 시절보다 두 배로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되고 나서 그 친구의 마음을 돌아본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처럼 연락할 수단이 많지도 않아 멀리 사는 친구와 얘기라도 나누려면 시간을 쪼개고 전화 요금을 걱정하며 수화기를 들어야 했던 그들에게 이 만남은 얼마나 눈물겹게 반가웠을까. 이제 그때의 그들보다도 몇 살 더 나이를 먹은 저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기분에 잠깁니다.

아직도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함을 못 견딘 제가 자꾸 재미없다고, 얼른 집에 가자고 졸랐던 기억 때문이에요. 엄마와 친구들은 웃으며 저를 달랬지만, 몇 년 만에 어렵게 만난 만큼 일찍 자리를 파하긴 싫으셨을 마음을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엄마가 그냥 저를 집에 두고 가시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인생의 재미있는 점은, 제가 이날을 어린 시절의 가장 특별했던 모험 중 하나로 기억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저녁 무렵 헤어지면서 엄마의 친구들은 용돈으로 천 원짜리 몇 장을 주셨어요. 저에겐 꽤 큰돈이었고, 엄마는 저를 종로서적에 데려가서 책을 한 권 사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많은 책과 사람을 한꺼번에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어버린 뒤 동네 집집마다 찾아가 책을 빌려오곤 했던 저에게 대형서점은 정말 충격적인 공간이었어요. 형광등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꽂혀있고 서가 사이에 서서 책을 고르거나 읽던 어른들의 뒷모습은 제가 만난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종로서적을 나온 다음 혼잡한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노점에서 종이봉투에 담아 파는 군밤도 한 봉지 샀습니다. 저는 지금도 군밤을 아주 좋아하는데, 어릴 때는 그 냄새와 껍질 사이로 보이는 노릇한 모양이 특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거든요. 그래서 제 돈을 주고 군밤을 살 수 있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신중하게 고른 책은 <중국의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책값은 2천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청나라 초기의 기담 모음집인 <요재지이>의 몇몇 이야기를 어린이용으로 엮은 책이었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거나 귀신과 결혼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위인전이나 전래동화 외의 책을 별로 접해본 적 없던 저에겐 엄청나게 자극적었어요. 그중 한 이야기는, 남편이 갑자기 죽어 슬퍼하던 여인에게 지나가던 수상쩍은 도사가 자기가 뱉은 가래를 삼키면 남편을 살려주겠다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불쾌하고 의심스럽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던 여인이 도사의 말을 따르자 새로운 심장이 생겨나서 남편을 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더럽긴 한데, 어린이가 몰입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지요. 생각해보면 이 책은 제가 접한 최초의 장르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집에 <요재지이> 완역본이 있는데, 이제 읽더라도 그렇게 푹 빠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아쉽기도 해요.

저는 아이가 없지만, 한 인간이 태어나 세상이라는 곳을 만나고 그 세상이 점점 넓어짐을 느끼는 경험이 얼마나 놀라운가에 관해 가끔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그 경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던 시대에 그것이 가능한 공간과 조건 아래서 자라는 행운을 누렸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칭얼거리는 친구의 아이에게 끝까지 상냥하게 대해 준 어른들이 얼마나 ‘어른’이었나 뒤늦게 실감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제가 이날을 오랫동안 즐겁게 기억하는 건, 낯선 사람들과 넓은 세계가 저를 받아들이고 환대해주었다는 감각 덕분인 것 같습니다.

슬프고 안타깝고 어이없는 소식이 이어지는 날들이지만, 잘 지내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