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무척 쨍쨍하고 길을 걷다 보면 죽은 매미가 종종 눈에 띄는 요즘입니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은 너무 참담해서 더위와 함께 정신을 멍하게 만들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죄책감 속에 에어컨을 켜다가 8월이 시작되었네요. 오늘은 몇몇 분들이 <없는 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보내주셨던 질문에서 출발해 아이 없이 나이 드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5060 이상 딩크 분들에게 궁금한 점 있어요. 딩크를 고민할 때 늘 걸리는 부분이 ‘지금(3040)은 좋지만 노년에는 외롭다, 후회한다’라는 얘기인데 어떠신지요.
자유 11]
[“둘이 젊은 지금이야 좋지, 병들고 외로운 노년엔 분명히 후회할 것”이라는 지겹고도 지겨운 저주에 관한 이야기, 다뤄주세요.
익명]
‘나이들면 후회할 거다’는 아이 없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듣는 우려, 혹은 비난, 어쩌면 저주이기도 할 겁니다. <엄마됨을 후회함>의 저자인 이스라엘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 역시 아이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넌 후회할 거야! 그렇게 돼. 아이가 없는 걸 후회한다고!”라는 말이 마치 판결문처럼 던져지곤 한다고 썼던 걸 보면, 이는 한국만의 특성도 아닌 것 같고요.
나보다 앞선 세대에서 아이 없이 살았던 ‘선배’들을 거의 볼 수 없기에 무자녀 부부, 혹은 개인의 노후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0대에 결혼해 아이 없이 살기로 하고 80대까지 해로하고 계신 시인 한소자-작곡가 안일웅 내외분의 삶이 <인간극장>을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50대 이상 자발적 무자녀 부부의 삶이 그만큼 드러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거예요.
미래는 늘 불투명하고, 나이 듦은 계속해서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을 삶으로 가져옵니다. 아직 건강에 큰 문제가 없고 세상이 굴러가는 속도도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는(키오스크는 사용할 수 있는데 코인은 손도 못 댑니다.) 저 역시 가끔 불안해지거든요. 물론 여기엔 아이 없는 삶에서 느낄지 모르는 쓸쓸함과 한국에서 노인이라는 약자로 살아갈 삶에 관한 공포가 뒤섞여 있기는 합니다.
애럴린 휴즈의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원제: Kid me not)는 1960년대에 성인이 되어 아이 없이 60대까지 살아온 여성 열다섯 명의 에세이를 엮은 책이에요. 저자이자 편집자인 휴즈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공연예술가이고, 텍사스주 오스틴에 처음 생겼던 낙태 클리닉 관리자였다고 합니다. 결혼과 이혼, 임신중지를 경험하며 이번 생에는 절대 아이를 낳지 않고 다시는 결혼도 하지 않기로 한 그는 자신이 아는 아이 없이 살아온 여성들에게 그 삶에 관해 들려달라고 부탁해 이 책을 만들었어요. 미국에서는 2014년에, 한국에서는 201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미국에서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과 수많은 정치적 사건으로 점철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출간되어 제 2물결 페미니즘에 불이 붙고 전미여성기구가 창립되었으며, 경구피임약의 등장으로 여성들은 어머니가 될지 말지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가정환경은 기독교, 유대교, 가톨릭교, 텍사스 토박이, 이민자 등 다양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어머니 세대와 크게 달라진 세상에서 수많은 도전과 모험에 뛰어들게 됩니다.
휴즈의 친구 중 한 명인 주디 존슨 발라드의 어릴 적 꿈은 부자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는 것이었다고 해요. 고등학교 시절 뭐든 함께 할 만큼 친했던 둘은 어느 날 사소한 이유로 발끈해 49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다시 연락이 닿은 뒤 둘 다 같은 선택을 했다는 데 신기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발라드는 서른아홉 살에 했던 두 번째 결혼에서 아이를 원해 난임 시술을 받았지만, 막상 시술 후엔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고 이때 임신이 되지 않자 다시는 시술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고 상담하고 언어치료사로 활동했으며 동물들을 돌보며 사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고 해요. “살면서 해온 선택을 후회로 바라봐서는 안 되지만”이라고 운을 띄운 그는 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뭐, 나는 바꿀 만한 몇 가지를 댈 수 있다. 예컨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친구를 잃은 것이라거나. 하지만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한 결정은? 그것은 바꾸고 싶은 결정 10위 안에도 들지 않는다.”
결혼과 이혼, 부모의 문제, 고통스러웠던 연애, 누군가에겐 지독하게 수치스럽고 누군가에겐 그저 편의적인 문제였던 임신중지, 배우자나 자신이 저지른 외도, 위탁 부모가 되려다 실패한 일, 배우자의 아이를 함께 키운 경험 등 친밀한 관계와 가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저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대단히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아이 낳는 걸 깜박했다는 사람도, 막상 이 나이가 되니 손자를 갈망하게 된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후회보다 오히려 운 좋은 인생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은 대부분 고학력 여성이고 교수, 사업가, 작가, 예술가 등 직업적으로도 성공한 편이기에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인종에 관한 정보가 별도로 나오지는 않지만, 백인 여성이 다수로 추정되구요.) 게다가 60년 전 미국 여성의 삶이 2020년대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딱 맞는 거울은 아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앞 세대의 무자녀 부부들이 살았던 세상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르듯, 우리가 아이 없이 나이 들며 살아갈 세상은 앞으로 또 많이 달라질 거예요. 그러니 알 수 없는 미래를 지레 두려워하기보다는 씩씩하게 이 삶을 헤쳐나가고 여기서 보람과 기쁨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선배’들의 이런 말에 용기를 조금 얻었거든요.
“자식을 낳지 않아서 후회되느냐고? 크리스마스에만 좀 그런 것 같다.”
“후회하느냐고? 누가 안 하겠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작년 이맘때, 제가 다니는 학교의 교정에는 가을에 졸업하는 학생들을 위해 친구들이나 동아리에서 걸어준 재미있는 문구의 현수막이 많이 붙어있었어요. 그중 기억에 남았던 건 “철학과 나와서 뭐 하느냐고요? 제가 한 번 살아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었어요. 어디 가서 전공을 밝힐 때마다 수백 번쯤 들었을 무례한 질문, ‘거기 나와서 뭐 먹고 살래?’에 산뜻하게 받아치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 후로 “애도 없이 나이 먹고 어떻게 살래?”라는 말들과 마주할 때마다 생각합니다. 제가 한 번 살아보고 말씀드리겠다고요.
별 일 없이 사는 게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별 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