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꿈을 꾸었습니다. 낯선 교실에서 시험을 보는데, 종료 시간이 다 되도록 답안지는 텅 비어 있고 OMR 카드에 마킹하려 할 때마다 연필이 자꾸 엉뚱한 칸을 채우는 내용이었어요. 잠에서 깬 뒤 메일함을 확인하다가 이유를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 본 토익 점수가 발표되는 날이더군요.

몇 년 전, 봄알람 출판사의 이두루 대표를 인터뷰하다 크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출판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토익을 너무 보기 싫었어요. 이렇게까지 싫으면 안 해야 한다, 생각하다가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죠.”라는 대답이 돌아왔거든요. 저도 학생 시절 토익을 너무 보기 싫었기에 그 말에 200% 공감했습니다. 사실 저는 토익뿐 아니라 모든 공부가 싫었는데, 특히 영어 공부가 싫었습니다. 토익 학원에 등록한 적도 있고, 학교에서 진행되는 외국어 수업을 신청한 적도 있지만, 출석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토익 점수같은 스펙을 요구하지 않는 비정규직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요.

그 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토익을 붙잡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학원 졸업 요건에 영어 점수가 있더라고요. 1학기 때는 반쯤 넋이 나간 채 학교에 다니느라 손도 못 댔고, 지난 겨울 방학에 간신히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학원에 가지 않고도 동영상 라이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유명하고 인기 있는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했는데, 사실 효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멈췄던 제 수준에 비해 너무 어렵고 빠르게 진행되었거든요. 다만 선생님의 독특한 말투와 캐릭터를 보며 ‘일타강사’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고, 카톡방을 통한 공지나 질의응답 같은 신문물을 경험했죠.

올봄에는 처음으로 토익에 응시했습니다. 대체 이게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시험인지 일단 부딪혀 봐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인생을 매사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문제임을 잘 알면서도) 덜컥 접수부터 한 거지요.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 든 생각은, 두 시간 동안 집중하며 앉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는 거였어요. 듣기 파트에서 계속 문제를 놓치고 허우적대다 읽기 파트로 넘어오니 정신이 혼미하더라고요. 마지막엔 그저 찍느라 바빴습니다. 점수는, 제가 우려했던 정도인 발 사이즈 보다는 높았고 졸업하기엔 턱없이 낮더군요.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 좋았겠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8월부터 온라인 강의를 듣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제 수준에 맞춰 입문반에 등록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선생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아는 듣겠더라고요. 어떤 문제에 어떤 의도가 담겼고, 어떤 패턴의 함정이 있는지 듣다 보니, 과거의 제가 눈에 보이는 함정마다 아주 힘차게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긴 했는데 과연 어떨지 모르겠네요.

듣기 파트에 비해 읽기 파트 수업은 좀 더 어렵습니다. 원래도 풍부하지 않았던 어휘를 거의 다 잊었거든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다들 “나 영어 잘 못 해”라고 말하지만, ‘못함’의 기준이라는 것도 제각각 같습니다. 비즈니스 영어를 무난하게 구사하는 사람도, 외국인과 영어로 일상 대화가 가능한 사람도 자기 영어 실력이 좋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저는...정직하게 말해서 꽤 못하는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어를 사용한 게 언제였나 생각해보니, 재작년에 지하철 기다리는 줄을 서다가 한 백인 남자가 뒤로 가라고 하는 데 발끈해서 “I was there.”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내가 원래 네 앞줄에 서 있었다”이긴 한데요. 뭐, 그렇습니다...

영어의 가정법은 도대체 왜 그 모양인가. 부정의문문에 대한 대답이 yes인지 no인지는 왜 평생 헷갈리는가. 그래서 p.p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동기부여 강사처럼 자신감 넘치는(“저만 잘 따라오시면 여러분 모두 해내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홀린 듯 따라가다 보면 수업이 끝납니다. 최근에는 동명사와 to 부정사에 대해 배웠어요. 이것도 오랜만에 접하는 개념이라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신선하더군요. 큰일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이 너무 귀찮고 지루하고 피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약간 즐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새로운 단어를 외우는 건 어렵지만 30년 전 외웠던 단어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는 걸 느끼거나, 문제를 풀 때 무엇을 먼저 파악해야 하는지 배운 다음 실제로 그것을 적용해 답을 맞히는 순간의 기쁨이 있거든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뇌의 어떤 부분에서 먼지를 털고 닦은 다음 기름칠해 돌려보는데 삐걱대는 톱니바퀴가 느리게 한 칸 움직이는 기분 같은 거지요. 물론 이 톱니바퀴를 굳이 굴리지 않아도 됐다면 몸도 마음도 훨씬 편했겠지만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 것 아니겠습니까. 

엊그제 발표된 두 번째 토익 점수는 첫 번째보다는 조금 올랐습니다. 시간 배분을 엉망으로 한 읽기 파트 점수는 오히려 더 떨어졌지만요. 졸업 기준 점수까지는 아직 100점 이상을 더 올려야 합니다. 언제 달성할 수 있을지, 정말로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또 이렇게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올해의 3분의 2지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더위가 한풀 정도 꺾인 것 같지만 아직은 여름이네요.

코로나가 다시 유행 중이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