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0대 중반입니다. 부모님께서 알고 계시는 제 상황은 이렇습니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으며 (같이 산다는 건 엄마만 아십니다) 올해, 내년 중 결혼 비스무리한 걸 할 거라고요. 그런데 엄마도 아빠도 너무 당연하게 미래의 손주를 기대하는 말씀을 하세요.

예)

엄마: (집 공사하면서) ~~를 ~~로 만들 건데 그러면 애들 와서 놀기도 좋고~

나: 애들이 와? 누구네 애들이 와? (저희 가족 주위에 20세 미만 아동이 있는 집은 이제 없습니다)

엄마: 나중에 너희(저희는 3남매입니다.)가 애 낳으면~

이런 소리를 하지 않나. 후….

엄마, 아빠에게 저는 진심 아이 생각이 없다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그냥 이대로 계속 희망만 품다가 시간이 가면 저절로 포기하게 둬야 하는 건지, 뭐가 절 위한 건지, 뭐가 부모님에게 더 나은지. 정말 진짜 1도 감이 안 잡힙니다.

- 실버]

얼마 전 한 스터디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저출생 문제를 연구하던 중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함께 읽고 저를 초대해주신 건데요. 그 자리에서도 비슷한 고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낳고 키워준 사람들에게, 나는 아이 없는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말이죠. 

제 부모님도 자식 중 하나가 아이 없이 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셨습니다. 엄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주를 보고 와서 “올해 너희가 애를 가지면 복덩이란다”라는 말로 저를 설득하려 하셨어요. 그때는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저를 알지도 못하고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들이 방 안에 앉아서 한 인간의 탄생을 좌지우지하려 하다니, 그것도 돈까지 받아가면서! 게다가 다른 무자녀 여성들도 비슷한 얘기(아이를 낳아야 대운이 들어온다, 이 아이를 안 낳으면 큰일난다 등)를 들었다는 말에 역술인협회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검은 커넥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후, ‘그런’ 제목의 책까지 내고 나니 부모님도 더는 아이 얘기를 안 하시지만, 사실 제가 이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결정적 요인은 조카들 같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언니에겐 두 아이가 있거든요. 아이 없이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꺼내는 첫 번째 레퍼토리, ‘나만 손주 없어’ 문제가 일찌감치 해결된 거죠. 하지만 외동이거나, 형제가 있더라도 다들 아이가 없는 경우엔 마음이 좀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 들어 약해져 가는 부모님이 남의 집 손주를 보며 부러워하고 내 아이를 보고 싶어 하실 때, 미안할 일이 아님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쳐드니까요.

그럴 때 저는 인터뷰로 만났던 호정 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남의 손자 동영상을 보며 귀여워하시는 걸 보면 조금 미안하긴 한데, 모든 사람이 모든 걸 누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제가 아이 있는 삶의 활기와 변화무쌍함, 한 존재로부터의 절대적 사랑 같은 것까지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삶에서 모든 걸 누릴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손주를 기대하신다 해서 내가 아이를 가질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부모님의 몫입니다. 이건 ‘효’나 사랑과는 또 다른 문제이고, 어떤 면에서 이해나 설득보다도 협상의 영역입니다. 나는 내 삶의 이 영역에 관해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해서 선을 긋고 상대의 태도를 지켜볼 수밖에요.

물론 아직 뚜렷한 갈등이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부딪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락을 구할 일도 아니고 내가 결정을 바꿀 것도 아닌데 문제를 계속 수면 위에 올려놓으면 서로 상처가 늘어나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지치니까요. 저는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이 반대하실 것 같은 일이 있으면 알리지 않고 그냥 하면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한 살 두 살 더 먹으며 버티다 보면 포기하시는 때가 오더라고요. 물론 그마저도 견디기 힘들 만큼의 관계도 있으니 제가 너무 속 편한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실버 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신 뒤 해가 바뀌었으니 그사이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부모님은 여전히 당연하게 손주 얘기를 하고 계시는지도요. 사실, 3남매시라면 일단 다른 형제들에게 슬쩍 공을 넘기고 버티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공을 돌리고 돌리다 보면 부모님도 포기하시는 날이 오겠지요. 아이 없이 사는 것은 삶의 한 선택일 뿐, 그 자체가 ‘불효’나 불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추석입니다.

가족과 함께 사시든, 오랜만에 만나시든, 친척과 모이시든 ‘결혼해라’, ‘아이 낳아라.’라는 오지랖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지키실 수 있길 바랍니다. 맛있는 음식 드시고, 무엇보다 많이 웃는 하루 보내시길.

안녕히 계세요.

추신. 요즘 오프라인에서 ‘없는 생활’의 독자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만큼 기쁩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응원 메시지 보내주시는 분들도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