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혼 무자녀로 살아가지만 일터에서는 기혼 유자녀분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삶, 근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없는 생활’ 레터를 받아보기 전까지 기혼 무자녀의 삶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서 출산하지 않는 여성은 무책임하고 철없다는 (얼척없는) 비난을 수시로 당하는데, 비혼의 입장만 생각하느라 기혼 무자녀의 입장은 잘 떠올리지 못했던 것도 같고요.

저희 어머니만 하더라도, 1) 누구네 집 아들/딸이 결혼을 했는데 2) 아이는 없다더라, 식으로 말씀하세요. 인생에 갖추어야 할 조건 두 개 중 하나는 합격인데 하나는 불합격(혹은 보류)인 것처럼요. 어머니의 기준대로라면 저는 두 개의 조건 모두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족하고, 무책임하며, 앞날이 걱정인 인간인 셈이죠.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속상하고 화도 났는데,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가시면서 생명의 빛이 흐려지는 모습을 보면 우리 가족의 삶에는 “활기”가 없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기도 해요. 아기의 존재가 활력소가 아닌 걸 충분히 알면서도 말이죠.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의 선택이, 내 마음이 후회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는 일의 영향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와 다른 조건의 사람을 이해하고 응원하고 곁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것은 내 자신이 나와 다른 조건의 사람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받고 싶다는 마음의 반증이기도 하겠지요.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결혼 여부로, 자녀 유무로 우리를 “갈라치기” 하려고 해도,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요. 결혼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그 삶에 세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 ‘없는 생활’이 도움이 됩니다. 비난이 난무하는 거친 바다를 건너가는데 필요한 ‘노’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 mossi]

mossi님의 편지를 받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가끔 이 편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기혼/무자녀가 아닌 분들에게도 ‘없는 생활’이 가서 닿는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제가 한 일에 비해 너무 큰 칭찬을 해 주셔서 어딘가로 조금 숨고 싶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지현우 씨 짤)

사실 저희 어머니 역시 주위 사람의 자녀는 물론 TV 속 연예인을 보실 때조차 “쟤는 왜 결혼을 안 한다니?”, “저 집은 왜 애가 없어?”라는 말씀을 종종 하는 분이셨습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후자에 대해서는 별말씀 안 하시더군요. 엄마의 자식이 바로 그런 사람이니까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꾸려졌습니다. 그런데 라이프스타일과 가족 구성이 빠르고 다양하게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며 또래나 친구라 해도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고 그 때문에 갈등에 빠지는 관계도 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떤 이유로든 ‘이기적이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오고, 이때 한 발 물러나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지금 한국 사람 대부분에겐 없는 것 같아요. 각자도생만이 답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느라 지치고 불안해져 있거든요. 그러다 보면 막연히 나에게 이질적인 집단이나 거기 속한 사람에 대한 반감이 들고 부정적 측면만을 보게 되고 그것이 내 안에서 점점 커지고…. 결국엔 진짜 살아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구성된 이미지만이 남아 서로 영영 닿을 수 없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실은 저 또한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구요.

그런데 얼마 전 저의 비혼 친구가 저에 대해 “걔는 아직도 애 없이 사니?”라고 물으시는 엄마에게 “엄마, ‘아직도’가 아니라 걔는 그냥 계속 그렇게 살기로 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무척 고마웠습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이 내 삶에 대해, 그것은 틀린 게 아니며 그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내가 없는 곳에서도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요. 아마도 그것이 나와 다른 조건의 사람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일 테고, 저 또한 더욱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의 교수님은 50대 후반의 자발적 무자녀 기혼여성이세요.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다 같이 무자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에피소드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어느 날 동료에게 조교에 관해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더니 “선생님, 내 새끼 키워봐. 학교에서 만나는 조교는 신 같아!”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자기 자식과 조교를 비교하면 어떤 조교라도 칭찬하게 된다는 거죠. 저희 교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은 이후, 자신이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 학생들의 미숙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너무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셨다고 해요. 교수님은 그것이 자신에겐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친구의 자녀들을 포함해 혈연이 아닌 젊은이들의 좌절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성장과 모험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할 수 있는 것이 무자녀 삶을 통해 얻은 가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mossi님의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여름이로구나 싶은 날씨입니다.

정신없이 햇볕을 피해 다니다가도 활짝 핀 장미 덩굴을 보면 반갑더군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