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뭐라고 이런 얘기를 하지?’라는 걱정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없는 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새로 도착한 편지를 만날 때마다 반갑지만, 사실 저는 결혼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잘 알거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다만 이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주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저는 조금이나마 알고, 세상 어딘가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있으니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요. 지난번 편지인 ‘아이 없는 결혼과 이혼이라는 선택’을 읽고 ‘반장’ 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읽는 동안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결혼 3년 차 여성입니다. 저는… 망설임이나 걱정은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그 아이가 저의 성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임신, 출산, 양육과정에서 저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생각하면 그건 제가 바라는 가장 최소한이자 당연한 일로 생각돼요. 아이 성을 남편 성으로 하면서까지 아이를 꼭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런 내가 이기적인가 싶고 답은 그냥 남편 성을 쓰면서 아이를 낳는 것뿐인가 싶기도 합니다.

처음엔 제 마음만 생각하고 남편이나 시가에는 잘 설명하고 이해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문제로 남편과 갈등이 깊어집니다. 긴 시간을 보내면서 남편도 이제는 제 마음이나 이렇게 하고 싶은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족과 주변의 시선 때문에 시도할 용기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에게 자기 성을 주고 싶은 욕구도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려 노력할 에너지가 없다는 점 같습니다. 그래서 부부 상담을 다니고 있는데 상담 선생님이 저보다 남편의 입장을 더 쉽게 이해하시는 것 같이 느껴져 말을 꺼내기가 어렵기도 해요.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제 이야기를 들으면 당황하거나 이런저런 문제들을 걱정하는 게 우선이라 외롭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 이미 이 문제를 깊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미리 상의해야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싶어지니 이 문제를 잊어버렸어요. 그러니 이 모든 게 더 제 책임 같고, 책임이 있는 제가 직접 돌파구를 찾고 해결해나가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막막해요. 혼인신고서의 “아이가 모의 성을 따르기로 한다”라는 항목에 미리 체크하지 않아서, 남편이 내 생각에 동의할 수 있게 부드럽게 설득력 있게 긍정적으로 대화하지 못해서, 그냥 내가 유별나고 이상해서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후회와 자책을 해요. 한편으로 이제는 나에게는 이 문제의 답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니 남편과 주변의 반응에 화가 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의 방향이 다르면 이혼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선뜻 결심이 서지 않습니다. 승주 님의 밝고 튼튼한 대답이 반가우면서도…나는 왜 저렇게 생각하지 못할까 답답해요.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는 제 마음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부부로 함께 살려면 당연히 나눠야 하는 이야기이고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막상 갈등 속에 들어오니 쉽지가 않네요.

작가님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리고 저는 이 말을 저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적용해야 할 것 같아요. 이게 제 잘못인지, 남편의 잘못인지 따지고 탓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거든요. 이 문제를 이렇게 어렵게 만든 법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속에서 별생각 없이 권리를 누릴 예정이었던 남편과 그 권리 중 일부를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얻어내야 하는 저 사이에 있는 권력 차를 생각하면 자꾸 남편이 미워집니다. 이렇게 동등하지 못한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저도 미워요.

- 반장]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우선해서 따르도록 하는 것을 부성 우선주의라고 합니다. 2007년 호주제가 폐지된 뒤에도 이 가부장제의 잔재는 민법 제 781조 1항 “자(子)는 부(父)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母)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라는 내용으로 남아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아이를 낳는다면 나의 성을 물려주고 싶다는 반장 님의 입장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것이 ‘최소한이자 당연한’ 일이라는 데 매우 공감하고요. 다만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구습이 이 당연한 바람을 유별나고 이상한 것으로 취급해온 것뿐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만은 아닙니다. 지난 2020년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아이의 성(본)을 부부가 협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고, 혼인신고가 아니라 아이의 출생신고 시 이를 결정하게 해 달라는 청원글이 올라오기도 했으니까요.

이 당시 저는 수신지 작가님께서 부성 우선주의 문제를 ‘출근할 때 미리 구내식당 점심 메뉴 정하기’에 빗대어 그리신 만화를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수신지 작가님의 또 다른 만화 <곤 GONE>에도 혼인신고 시 자녀가 엄마 성을 따르도록 하겠다고 표시했던 노민아-제갈경 부부가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혼인신고 당시에는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노민아의 제안을 따랐던 제갈경이, 막상 노민아가 임신하고 이 일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자 “나는 외동아들인데 그렇게 하면 우리 집 대가 끊긴다”라는 식으로 말을 바꾸었다는 점이에요. 대…21세기에 ‘대’란 대체 무엇일까요?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이 주제와 관련된 사람들의 반응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아빠가 아니라 엄마 성을 따른 아이가 받을 오해’를 걱정하면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자기 성을 물려주겠다는 여성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의미 있는 일인 건 알지만 자식이 상처받을 테니 나라면 안 한다”라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 없는 사람이라서일까요. 그들이 말하는 ‘어쩌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오해와 상처’는 지나치게 부풀려진 방패일 뿐, 사실은 그저 변화를 원하지 않아서 하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적어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부정적인 말보다 응원을, 왜곡된 시선을 같이 바꾸어나가겠다는 다짐을 먼저 들려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아이의 미래가 걱정인 양 자꾸 태클 거는 제갈경에게 노민아가 말한 것처럼요.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빠 성을 따르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저는 이런 세상에서 모든 책임은 결코 반장 님의 몫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저도 혼인신고 할 때는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낳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던 때도 아니었으니 만약 그 후로 제가 아이를 갖고 싶어졌다면 반장 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었을 수도 있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혼인신고 서류 작성이 보통 정신없는 게 아니잖아요. 본적이니 증인이니 익숙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빼곡한 빈칸을 채우다 보면 “아이가 모의 성을 따르기로 한다” 항목을 놓치기란 너무 쉽습니다. 바로 그 점,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아빠 성을 따르게 만드는 시스템이 잘못되었을 뿐 이를 놓쳤던 반장 님의 탓이 아닌 거죠. 그래서 이 불평등한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던 것인데, 정권이 바뀐 후 이 변화의 흐름이 백지화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러니 남편분의 잘못을 따지고 싶은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존재만으로 어떤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람과, 그 권리를 얻기 위해 남들에게 유별나다·지나치다는 소리를 들으며 고군분투하는 사람 사이에는 실제로 뚜렷한 권력 차가 존재하니까요. 한국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간 여성은 관계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도 혼자 너무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 자체가 불평등임을 남성이 인정하지 않을 때 갈등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앞으로 부부 상담을 더 받아보신다면, 보다 성평등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부장제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상담은 여성의 정당한 문제 제기를 부정하거나 묵살하며 문제 해결과 멀어지고 여성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더라고요.

무엇보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선뜻 이혼을 결심할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한다는 거예요. 지난번 말씀드린, 승주 님의 밝고 튼튼한 대답을 들었을 때 해방감을 느꼈던 것만큼이나 제게 기억에 남은 인터뷰가 있거든요. 시부모님이 장남인 남편의 아이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얘기에 문득 “내가 쫓겨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 적 있다는 보라 님은 이어서 멋쩍게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아주 대차게 맞서고 나와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잖아요.” 이혼을 금기시하거나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한편, 내가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기로 했던 사람과 어지간하면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심정을 저도 너무나 잘 알기에 함께 웃고 말았습니다. 반장 님은 동등하지 못한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이 밉다고 하셨지만, 이렇게나 가까웠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은 일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자신을 재촉하거나 질책하지 마시고 차차 마음이 흘러갈 시간을 주세요. 남편분이 반장 님에게 동의하시게 된다면 반갑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반장 님의 설득이 덜 부드럽거나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 갈등의 원인은 자신이 아니라 잘못된 제도에 있음을 기억하세요. 언젠가는 부성 우선주의가 폐지될 수 있도록 저도 계속 힘을 보태겠습니다. 마음이 힘드신 와중에도 이야기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2022년도 끝나가네요. 또 한 해를 살아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나고 돌아보면 좋은 순간이 더 많이 남아 있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얼마 전 저는 김승일 시인이 2018년 <GQ>에 기고한 “딩크 부부가 말하는 ‘자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모든 딩크 부부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대목은 놀라울 만큼 제 마음과 같아서 몇 번이나 혼자 웃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어요. “나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있고, 철이 들었고, 인구 절벽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 단지 우리 부부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반갑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