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아주 큰 기대를 하고 간 건 아니었습니다. 궁금함 반, 의리 반 정도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는 이제 덕후의 삶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십 대부터 삼십 대에 걸쳐 인생을 걸었던 온갖 덕질이 저에게 남긴 건 결국 사회면에 실린 ‘오빠’들의 기사를 비롯해 상당한 환멸과 피로감이었습니다. (혹시 좀 더 자세한 얘기가 궁금하시다면 <이런 얘기 하지 말까?: 열정적 덕질과 그 후의 일상>을 읽어주시길~) 그래서 그 후로 이어진, 무엇에도 열렬히 몰입하지 않고 한 발 떨어져 즐기는 생활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오프닝에서 울려 퍼지는 베이스 기타 소리(당당당당-당당당당-당당당당-)와 함께 드로잉으로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북산 농구부원들이 저에게로 걸어오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멈춰 있던 제 (덕후의) 심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을요! 그리고 이어진 두 시간 동안 저는 울며 ‘불꽃남자’ 깃발을 휘두르는 영걸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슬램덩크>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같은 반 남자아이가 맹장 수술을 해서 친구들과 문병을 갔다가 병실 안에 있던 만화책을 무심코 집어 들었습니다. 능남과의 연습경기가 진행 중이었던 것 같아요. 첫화부터 본 것도 아니고 농구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는데 눈을 떼지 못하고 정신없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그림, 그런 이야기, 그런 만화는 처음이었거든요.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도 만화책을 놓고 병실을 나서기가 너무 아쉬웠습니다. 문병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아예 잊은 채였죠.

중학생이 된 저는 <슬램덩크> 사 모으기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언니를 꼬드겨 용돈을 합치고, 학교 앞 문방구 유리창에 “<슬램덩크> XX권 발매!”라는 종이가 붙은 날이면 집까지 달려가 돈을 가지고 나와 다시 달려왔어요. 저 같은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쌓여 있는 책 묶음에서 얼른 노끈을 끊고 새 책을 꺼내주곤 하셨습니다. 한 권에 2천 5백 원, 랩핑 때문에 살짝 우그러진 표면이 매끈매끈하고 차갑던 그 책을 받아들고 집으로 날아갈 듯 돌아오던 순간의 설렘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두 달에 한 번, 한 권의 책을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렸던 건 그때뿐이었어요.

무엇이 그렇게 좋았냐고 묻는다면, 멋지게 설명할 말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애정이 너무 크면 추억의 파편과 간헐적 감격(갑자기 혼자 울컥함 주의) 사이에서 헤매게 되는 모양이에요. 다만 언제나 운동을 싫어하고 못 하던 저는 <슬램덩크>를 보고 난 뒤부터 공을 들고 동네 한적한 공터로 나가 드리블을 연습하거나 농구 골대를 향해 혼자 슛을 던지곤 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저는 풋내기 슛을 연습하는 강백호가 되기도 했고, 멋진 포즈로 3점 슛을 쏘는 정대만이 될 수도 있었거든요. 어느 학기 초에는 특별활동 시간에 ‘남자 농구’만 있다는 데 울컥해 교장실을 찾아가 ‘여자 농구’도 만들어 달라고 항의할 만큼 농구, 정확히 말하면 <슬램덩크>와 연결된 세계에 진심이 되기도 했어요. 다행히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우리의 농구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슬램덩크> 완결 후 26년이 지나서 나온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약체인 데다 문제아 군단이던 북산 고등학교 농구부가 전국 대회에 진출해 명실상부 최강자인 산왕공고와 맞붙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저는 이 경기를 만화로 수십 번 보았는데도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결과를 아는 사람조차 의심할 만큼 전국 대회 우승팀의 벽은 너무나 높고, 점수 차는 점점 커지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북산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중학 시절 정대만을 각성시켰던 안 선생님의 말씀 “포기하면 바로 그 순간 시합은 끝나는 거야”는 이 시합은 물론 <슬램덩크>를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죠.

사실 이제 낡고 지친 어른이 된 저는 “포기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힘들고 괴로우면 슬그머니 포기하는 사람인 데다, 포기해버린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려면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하지만 현실의 제가 고작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순간이 와도 포기하지 않고 “나의 영광의 시대는 지금”이라며 몸이 부서져라 코트를 질주하는 그들을 보는 것이 더욱 가슴 벅차게 느껴졌어요. 

산왕전을 보고 집에 돌아와 저는 <슬램덩크> 전집을 발굴하기 위해 8년 동안이나 베란다에 쌓아두고 방치했던 십수 개의 책 상자 정리를 시작했어요. 한번 치워야겠다고 생각만 하면서도 기약 없이 미뤄왔는데, 단 한 가지 이유가 생기니 움직이게 되더라고요. 물론 이 곰팡이와 먼지 더미에서 언제 정대만과 양호열, 윤대협을 구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순서대로 말해봤어요…. 여담이지만 저는 ‘니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다’ 부문 양대 천재는 다케히코 이노우에 작가와 과거의 이수만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은 남편이 친구들과 2차 관람 후 받아온 북산 팀 포스터를 방문에 붙였습니다. 인테리어의 ㅇ도 모르는 두 사람이 살다 보니 그저 휑하기만 하던 집에 취향의 한 조각을 더하는 건 아주 사소할지언정 기분 좋은 일이더라고요. 일상을 심드렁하고 미지근하게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저에게 필요했던 건, 어쩌면 이렇게 마음의 온도를 조금 올려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낼 계기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대중문화 콘텐츠를 보고 듣는 일을 한동안 해오면서, 사람들은 무엇에 특히 더 빠져드는가, 무엇에 유독 약한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취향이나 기준을 넘어 직관적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너무 뻔하고 두루뭉술한 분류지만, 그것은 재미있는 이야기, 좋은 노래, 아름다운 사람, 나의 추억이 아닐까 해요.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재미, 좋음,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는 앞의 세 가지와 달리, ‘나의 추억’ 만큼은 적어도 나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조건이기에 무척 힘이 세지요. ‘나의 추억’이 ‘우리의 추억’으로 연결되면 더 큰 폭발력을 갖고요. 저와 주위 친구들, 그리고 <슬램덩크>를 손꼽아 기다리며 성장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아마 요즘 그런 마음으로 이 열기를 즐기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기 있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안경 선배나 달재 같은, 그 세계 속 수많은 사람과 함께 울고 웃고 가슴 졸이고 농구공을 잡기도 했던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리면서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편에서 ‘<슬램덩크>는 한 시대의 추억을 넘어 영원한 클래식이고 성장물의 교과서이며 인류문명의 결정체이다!’라고 울부짖는 꼰대를 억.제.하려 애쓰는 제가 보이시나요?)

오늘의 사진은 <슬램덩크> TV판 애니메이션 오프닝에서 강백호가 서 있던 에노시마 전철 건널목을 ‘강백호 시점’으로 찍은 것입니다. 역시 <슬램덩크> 팬인 친구가 2009년 가나가와현에 성지순례 다녀온 추억이라며 보내주었어요. 사진을 사용해도 될지 묻자 흔쾌히 허락해줬을 뿐 아니라, 채소연 시점 건널목과 작중 능남고의 모델로 알려진 가마쿠라 고교 농구 골대 등 더 많은 풍경을 소개할 수 없음에 아쉬워하던 친구가 ‘서태웅의 등굣길’이라고 명명한 사진 한 장을 더하며 2023년의 첫 편지를 마칩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