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오사카 도톤보리 인근의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편지를 쓰는 일은 저의 오랜 로망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막연히 상상했던 것만큼 호젓하고 분위기 있지는 않네요. 방은 좁고 아직 싸지 않은 짐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고 저는... 졸립니다. 

이미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편지는 지난 번 편지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저는 오로지 슬램덩크 굿즈를 사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올라 여기까지 왔거든요. 4년 만의 해외 여행이다 보니 그 사이 만료된 여권부터 재발급받고, 황급히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MBTI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농담삼아 많이 얘기하는 'J의 여행'과 'P의 여행'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저는 확실히 후자일 겁니다. 저는 여행 계획 세우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알지 못하는 공간과 거리를 파악해 일정을 구체화하는 게 너무 혼란스럽고 어렵거든요. 그래서 '떠난다' '묵는다' '돌아온다' 정도의 기본적인 일은 빠르게 처리하되 세부 일정은 동행의 의견에 따르거나 되는대로 진행합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의 여행자라고 할 수 있지요.

출발 전 세운 계획은 두 가지였습니다. 1. 슬램덩크 굿즈를 산다. 2. 카레라이스 맛집에 간다. 

어제는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모인 지역인 덴덴타운에 갔습니다. 요즘 제 주위 사람들은 평소 제각각이던 관심사에서 벗어나 모두 슬램덩크로 대동단결하고 있기에 당연히 제가 원하는 것들(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많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몇 군데 가게에 들러 구석구석 눈에 불을 켜고 봐도 슬램덩크의 ㅅ조차 보이지 않더군요. 공이다 싶어 다가가면 모조리 <하이큐!!> 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의 어깨엔 저 자신 뿐만 아니라 정대만 팬 두 명, 서태웅 팬 세 명, 송태섭 팬 세 명, 강백호 팬 한 명을 위한 선물의 무게가 걸려 있었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손에 들어온 것은 채치수 티셔츠였습니다. 오사카에 있는 <소년 점프> 캐릭터 상품샵 두 군데와 한 백화점에 있는 슬램덩크 팝업 스토어까지 찾아갔는데, 팝업 스토어는 이번 주말까지 모든 게 품절이라고 하고, 점프샵에서 구한 티셔츠도 마지막 한 장이었어요. 결국 하루 종일 이만 보쯤 걸어다니느라 지치고 배가 고파진 저와 남편은 맛집이 다 문을 닫은 시간에 돌아와 숙소 앞 카페에서 평범한 카레라이스를 먹었습니다. 

헤메고, 기다리고, 서성거리고. 게으른 사람의 여행은 대략 이런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이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매일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한국에서라면 비싸서 굳이 가보지 않았을 카페에 들어가 케이크를 두 가지 주문하고, 한국에서도 살 수 있는 공산품이 조금 다르게 포장되어 있기만 해도 괜히 설레서 장바구니에 넣는 순간들이 즐겁거든요. (쓰고 보니 온통 소비에 관한 얘기 뿐이네요...) 

그러니 근사한 정대만 굿즈를 사지는 못했어도 "채치수를 최애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결과"라는 친구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레라이스 맛집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예스러운 분위기의 카페에서 레몬 소다와 함께 허겁지겁 먹어치운 카레라이스도 추억하기엔 충분한 맛이었어요. 

제가 본 것과 먹은 것 사진 몇 장과 함께 별 것 없는 여행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래 보여도 편지에 첨부하려고 무척 고심해서 찍은 사진들이랍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다시 아이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할게요. 

제가 한국에 없는 며칠 동안 강추위와 눈이 몰려왔다고 들어서, 집에 돌아가면 수도관이 동파되어 있지는 않을지 무척 걱정되네요. 다들 추위로 인한 피해 없으셨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