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제 꿈은 안경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땋아 내린 긴 머리카락에 원피스 차림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안경 낀 소녀의 이미지는 제가 상상한 ‘서울 아이’의 완성형이었거든요. 안경을 낀 친구들이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테를 무심하게 밀어 올리거나 정성스레 렌즈를 닦는 모습을 보면 귀찮겠다가 아니라 부럽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바가지를 대고 자른 것 같은 머리에 무릎을 덧댄 바지를 입고 틈만 나면 피아노 연습을 빼먹을 궁리만 하던 저의 시력은 양쪽 모두 1.5였으니까요. 물론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내가 안경을 끼게 된다면 그건 피아노 앞의 소녀가 아니라, 바늘귀에 실을 꿸 때마다 저를 부르던 할머니와 비슷한 모습일 거라는 걸요.

작년 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휴대폰을 볼 때마다 팔이 저절로 멀리 나가고 미간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게요. 무의식적으로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저를 보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작은 글씨를 읽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추는 제 표정은 엄마와 무척 비슷해졌더라고요. 어느 날부터는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이면 밖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글씨가 번져 보이면서 메시지를 쓸 때 오타도 잦아지더군요. 한 단어를 몇 번이나 고치고 또다시 확인하려 인상을 쓰다 보니 ‘중년 카톡’의 특징이라며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들에 왜 그렇게 오타가 많은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스마트폰은 화면 밝기를 조정하고 글자를 키워 볼 수 있는데 약이나 가전제품 등 작은 글씨로 인쇄된 설명서는 읽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실을 꿰려면 눈 밝은 손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마음먹고서도 이 낯선 과제에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몰라 몇 달이나 미루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것은 지난 기말고사 기간이었습니다. 눈에 띈 안경점에 충동적으로 들어가 시력검사를 받고 역시나 ‘노안’이라는 판정을 듣고 돋보기에 블루라이트 차단 렌즈를 골라 결제하고 새 안경을 받아들기까지 세 시간도 채 걸리지 않더군요. 안경을 끼자 책과 모니터의 글씨가 거짓말처럼 크고 선명해져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이렇게 작고 흐린 글씨를 읽어왔는지 의아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첫 며칠 동안은 안경을 끼고 있으면 어지러워서 멀미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새로운 도구를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내 몸이 그 도구에 적응할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갑자기 안경을 맞추는 데 들어간 비용도 계획에 없던 지출이라 조금 심란했습니다. 몇 년 전, 코로나19로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입한 물품 중 하나가 안경이었다는 보도가 떠올랐어요. 그때는 제가 안경을 끼지 않아서 몰랐지만, 이제는 생활에 여유가 없어졌을 때 사람들이 어떤 불편함을 견딜 수밖에 없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점점 낡아가는 몸에 들어갈 비용을 제가 어디까지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도요.

지난 몇 년 동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노화는 조금도 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질을 꾸준히 떨어뜨린다는 점입니다. 소화력은 예전 같지 않고, 반응 속도가 느려지며, 추위와 더위와 습도에는 더 민감해지고, 감각도 하나하나 퇴화합니다. 성장은 저도 모르게 진행된 것 같은데 노화는 매 순간 낯설게 다가오니 억울할 지경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아주 즐겁지만은 않은 변화까지도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흥미로움의 일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요) 기능이 예전 같지 않은 몸을 데리고 살기 위해 안경을 끼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찾아 먹고 양말을 두 겹 신고 가습기를 매일 관리하는 일상은 저에게도 새로운 경험이니까요.

이제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건, 지금 삶의 방식 또한 언젠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바뀔지 모른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왜 세상의 많은 책이 ‘마흔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거나 ‘마흔에 읽는 OOO’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성장기를 지나 본격적인 노화의 길목에 접어들어 헤매는 어른들에게는 안내서가 더욱 절실할 테니까요.

안경을 끼고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저의 동지들, 그리고 아직 안경이 필요 없으시다니 부러운 분들 모두에게 늦은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