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는 벼르던 일 한 가지를 처리했습니다. 처음으로 돈 주고 수건을 산 것입니다. 결혼할 때부터 쓰던 수건들 대부분은 엄마가 물려준 기념 수건이었어요. 자취하던 남편이 쓰던 수건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가장 오래 쓴 수건 몇 장은 친구가 아기 돌잔치 답례품으로 준비했다가 남았다며 준 것인데, 그 아기가 자라서 올해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갑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수건은 늘 어딘가에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증정’이나 ‘기념’ 같은 문구와 함께 날짜나 연도, 기수가 찍혀 있었지요. 입사, 창립, 결혼, 환갑 등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념일과 축일이 수건에 담겨 우리 가족의 일상과 함께했습니다. 수백 번, 혹은 그 이상 사용되며 세탁기에서 탈탈 털리고 햇볕에 바짝 마르기를 반복하면서 수건은 점점 얇아지고 가장자리는 올이 풀려 날긋날긋해졌습니다. 엄마는 수건이 낡고 헤질 때까지 쓰다가 더이상 기사회생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에만 걸레로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엄마의 장롱 깊숙한 곳에는 10년쯤 전 받은 수건들이 새것인 채로 쌓여 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수건을 사는 문제에 생각이 미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몇 년 전, 흰 수건을 표백하겠다며 뜨거운 물에 과탄산소다를 잔뜩 풀어 담갔다가(과탄산소다는 미온수에 녹이고 사용 시 꼭 환기하셔야 합니다!) 불그스름한 얼룩이 지고, 얄팍해진 수건들이 물을 흡수하다 지쳐 토해내는 지경인데도 조금 불편하다고만 느낀 정도였지요.

버티고 버티다 이제는 진짜로 수건을 사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지난가을 이사한 이후입니다. 예전 집에는 없던 욕실장이 생겨 수납공간을 넉넉히 사용할 수 있게 된 김에 너무 낡은 건 과감히 버리자는 결론을 내렸죠. 그러나 그동안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아이템을 구매하려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방학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트위터와 온라인 커뮤니티, 송월타올 홈페이지를 오가며 제가 원하는 수건의 상과 적절한 가격대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수건의 세계도 넓고 심오하더군요. 코마사, 뱀부얀, 160g, 40수, GSM ……. 이 중 가장 낯선 용어였던 GSM은 Grams per Square Meter의 약자로, 원단의 평방미터 당 무게를 의미하는데, 숫자가 높아질수록 수건이 두껍고 흡수력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정보를 종합해보니 매일 욕실에서 사용하기에는 40X80cm에 180g 이상의 수건이 적당할 것 같았고, 마지막까지 최고급 코마사와 뱀부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대나무 천연소재’라는 설명에 끌려 뱀부얀(200g, 625GSM)을 선택했습니다. 흰 수건에 대한 슬픈 추억이 있기에 얼룩이 눈에 띄지 않을 만한 회색과 청록색으로요. 이렇게 고심 끝에 데려온 새 수건 여섯 장과 함께 욕실장을 지키고 있는 중고 수건들을 먼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개봉 당시 특집 이벤트 용으로 만들어 “울트론 대항 기념 ㈜ 어벤져스”라는 문구가 수 놓인 수건.
• 김송희 작가의 에세이집 출간 기념 굿즈로 받은 수건.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책 제목), “다 씻었으면 이제 일하러 가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음.
• 남편이 재작년 송년 모임 선물 교환식에서 받아온 수건. 선물이 고민될 때 수건과 비누는 언제나 옳다.
• 큰외삼촌 팔순 잔치 때 받은 기념 수건. 곰돌이 자수가 포인트.
• 엄마가 친구와 함께 무료 음악회 공연을 보러 가서 받아온 경기고등학교 동문합창단 기념 수건. 두껍고 폭신해서 사용할 때마다 합창단 회원분들의 건강을 기원하게 됨.
• BTS 팬인 친구가 팬 굿즈로 여러 장 샀다며 나눠준 보라색 수건. 소재가 짱짱하고 질이 좋아서 매번 감탄하며 그 누군가에게 감사드림.

그 밖에,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와 함께 “하율, 첫 돌이에요.”라는 문구가 수 놓인 수건도 한 장 있습니다. 물론 저는 하율이가 누구네 딸인지 아들인지 지금 몇 살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세상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하율이라는 아이의 존재를 떠올리곤 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한 친구는 자기 방 욕실에 성남시 노인회 전·현직 회장 이름이 박힌 이취임 기념 수건이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장소에 매일 걸려 있다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라면서요.

어쨌든, 수건 구매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수건이라는 것이 이렇게 부드럽고 폭신할 수 있다니, 머리카락을 몇 번만 두드리면 물기가 흡수되다니, 건조기 없이 빨래 건조대에 말려도 보송보송하다니, 2만 9천 4백 원으로 삶의 질을 높일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무래도 새 수건을 사는 일 아닐까요. 저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호텔 수건 접기’ 동영상을 찾아 보고 두꺼운 수건이 풀리지 않게 접는 방법까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작별을 고하게 된 옛 수건들은 365일 항시 수건이나 담요가 필요하다는 유기견 보호소에 보냈습니다. 낡고 거칠어진 수건이라도 견사를 청소하거나 바닥에 깔아줄 때 유용하다고 해요.

엊그제만 해도 벌써 봄이 시작된 것 같더니, 하룻밤이 지나자 다시 겨울이네요.

역시 3월까지는 롱 패딩을 집어넣지 말아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