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틀었을 때 초반 5분 정도는 탐색의 시간입니다. 재미없으면 끄고 다른 걸 보겠다는 마음이 기본 탑재되어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날은 앉은 자리에서 일곱 편 정도를 쭉 이어 봤어요. 다음 날 저녁에도, 또 다음 날 밤에도요. 그렇게 소파에 눌어붙어 있다 정신 차렸을 땐 방학이 끝나 있었지만, 아직 못 본 <퀴어 아이>가 30편 정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퀴어 아이>는 다섯 명의 퀴어 남성(정확히 말하면 네 명의 남성과 한 명의 논바이너리)이 삶에 변화가 필요한 사연자를 찾아가 각각 패션, 인테리어, 음식, 문화와 심리적인 영역, 헤어 및 외모 꾸밈에 관해 조언하고 돕는 메이크오버 쇼입니다. 저는 별다른 취향이나 스타일 없이 대충 사는 사람에 가깝다 보니 메이크오버라는 장치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 쇼에서는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보다 보니 제발 저에게도 그들이 찾아와서 어수선한 방과 애매한 패션, 대책 없는 헤어스타일을 좀 해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퀴어 아이>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부딪힘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자신의 못생김을 구제 불능이라고 여기는 중년 남성, 종일 좁은 식당에서 부대끼며 일하는 자매, 수십 년 동안 학생들에게만 헌신한 공립 학교 교사,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고 느껴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청년, 오래전 부모가 세상을 떠난 집을 혼자 지키며 살아가는 노인,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도 장애를 얻어 휠체어 생활을 하는 소년, 게이 아들을 귀향 예배에 초대하고 싶은 크리스찬 여성, 농학교의 풋볼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농인 감독, 애인과 새 집에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레즈비언 등 <퀴어 아이>에 등장하는 사연자들의 연령, 인종, 성 정체성은 무척 다양합니다.

출연자들은 자신이 퀴어로서 가족이나 학교, 공동체 안에서 받았던 상처를 털어놓으며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연자들과 라포를 형성하고, 백인 경찰이 사연자로 등장했을 때는 흑인 출연자인 카라모가 경찰의 인종차별적 폭력에 관해 지적하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 에피소드인 시즌 1의 3화 ‘레이싱 파티’의 오프닝이 무척 인상적이에요.) 2017년부터 4년 동안 이어진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기에 <퀴어 아이>가 돌아와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 미국 사회에서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저는 이 프로그램이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족의 사랑, 노동의 신성함 등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소방관, 경찰 등 공공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부터 다양한 분야 사회활동가들의 노고를 조명하고 치하하는 방식 또한 상당히 세련되고 영리한 프로파간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퀴어 아이>를 통해 방송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가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나이든 남부 이성애자 남성이 태어나 처음 이렇게 ‘이상한(queer)’ 사람들을 만나 피부 관리법을 배우며 가까워지는 것은 그저 꾸밈의 영역만이 아니라 세계의 확장이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출연자와 사연자 간의 경험만이 아니라 이들을 보는 시청자의 경험이기도 하지요. 외로움, 무기력, 생활고, 일 중독, 커밍아웃의 어려움, 장애, 사별의 상처 등 사연자들의 ‘문제’는 나 자신 혹은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군가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거나 쉽게 배척하기에 <퀴어 아이> 같은 당의정이 의미 있는 거겠지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면에서 제가 무척 좋아했던 한국 예능 프로그램은 초창기의 <유 퀴즈 온 더 블록>입니다. 공교롭게도 <퀴어 아이>가 시작됐던 2018년, 이 프로그램에 관해 썼던 글이 있어 다시 찾아보았어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아재 예능’, 연예인들의 여행과 먹방 예능, 백인 남성들로 대표되는 외국인 예능 사이에서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 청년, 노인, 이주노동자 등 한국 미디어에서 소외됐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2살의 고민은 방학이 너무 짧다는 것이고, 13살의 관심사는 ‘남사친’이며, 고3의 꿈은 빨리 졸업해서 운전도 배우고 술도 마시는 것이다. (중략)

정답을 맞히면 가까이 있는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바로 뽑아주는 상금 100만 원은, 인생을 바꿀 정도는 아니지만 MC를 꿈꾸는 한 청년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잡아보는 큰돈”이기도 하다. 독서와 산책을 사랑하는 교사가 제자 수십 명의 응원에 둘러싸여 있을 때, 40년째 같은 자리에서 노점을 하는 노인이 와이키키 해변이란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할 때, 공부가 어려워질 테니까 중학생이 되기 싫다는 초등학생이 상금을 받으면 연신내에 가서 귀걸이를 사고 싶다며 자신이 아는 가장 멋진 번화가의 이름을 댈 때, 불과 몇 분의 시간 동안 정들어버린 그들이 꼭 퀴즈를 맞히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퀴어 아이>가 사연을 엄선해 다양성을 구성하려 노력한다면, <유퀴즈>는 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으로 다양성을 획득한 프로그램이었죠.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굳이 숨기지 않고 때로는 선명히 드러내는 <퀴어 아이>와 달리 <유퀴즈>는 보수성이 강하고 탈정치적인 예능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방송을 통해 마주치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갑자기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서게 되어 흥분하면서도 설레하는 그들의 눈빛을 보고, 예측할 수 없는 답변이나 엉뚱한 농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을 좀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거리로 나가지 않은 후로 <유퀴즈>에는 주로 엄선된 유명인이나 엘리트들이 출연하고, 저는 이제 거의 방송을 보지 않습니다.

원래는 얼마 전에 본 영화 <바튼 아카데미> 얘기도 하려 했는데 편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사전정보 없이 보러 갔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3월에 긴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는 기분이었어요. 아주 이상하지만 재미있는 사람들과 함께요. 만약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이 계시다면, 저처럼 우연한 행운이라고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아침-점심-저녁으로 바뀌는 날씨에 옷 입기가 정말 골치 아픈 요즘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추신. 지난 편지를 통해 ‘자발적 무자녀 기혼여성’에 관한 제 논문의 인터뷰 참여자를 모집했습니다. 신청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중에 개별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닌 지역에 거주하는 분이 계시다면 인터뷰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신청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