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직 미혼이고 만나는 사람도 없지만, 몇 년 전부터 결혼하게 된다면 무자녀로 살고 싶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최근 모임에서 알게 되어 관심이 생긴 남자분이 자기는 나중에 꼭 육아휴직을 해보고 싶다,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친해진 모임 멤버들과 같이 한강에 놀러 가서 지난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이분께서 ‘아이 셋은 낳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아서 둘까지는 낳고 싶다’라고 하더군요. 제가 짐짓, 관심 있는 여성이 아이를 안 낳는다고 하면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니 그 여성과는 추억으로 남겨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오랜만에 아이 문제를 제외하면 가치관도 잘 맞고 정치적 성향, 음악과 영화 취향도 잘 맞는 사람을 만나서 관심이 갔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30대 중반이고 그분은 저보다 5살 연상이고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분이었거든요. 어차피 갈 길이 다른 사람이라면 아예 만남을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니까 조금 슬퍼졌어요. 조금씩 이 분을 더 알아가고 싶고 만남도 시작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가치관이 다르면 아예 만남조차 시작하지 않는 게 맞는 걸까요?

- 더치스]

얼마 전 여성가족부가 공개한 2023년 가족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삶의 방식과 가족에 대한 가치관 중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라는 비율이 2020년 28.3%에서 2023년 34.6%로 늘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동의’가 곧 무자녀 삶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자녀 삶이라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확실히 늘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결혼과 무자녀 삶을 고려하는 개인이 자신과 같은 입장이거나 적어도 대화의 여지가 있는 상대를 만날 가능성에 있겠지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그 사람이 원하는 가족의 형태가 나와 다를 확률이 아직은 더 높아 보이니까요.

저의 경험과 제가 만난 무자녀 여성들의 이야기를 돌아볼 때, 무자녀 선택에는 개인의 삶과 사회를 넘나드는 복잡한 맥락이 얽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확고했던 사람도, 40대를 전후해 비로소 확고해진 사람도 막연하고 단순하게 무언가를 비관하거나 낙관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총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이를 결정하는 거지요. 사회학자 배은경은 <현대 한국의 인간재생산>이라는 책에서 어떤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되지 않고는 그의 선택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됨’과의 관계는 그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유성생식을 하는 포유동물로서 인류의 사회적 삶과 젠더 현실은 기본적으로 여성과 모성의 관계를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되지 않는 것 또한 여성에게 실존적 문제인 이유겠지요.

그런데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남성들에게도 ‘아버지됨’이 그만큼 실존적 문제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과 별개로, ‘결혼하면 아이를 갖고 싶다’라는 바람을 갖고 그렇게 말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아이를 몇 명 낳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 남성이 그 아이를 낳을 여성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아이가 없는 삶과 있는 삶이 얼마나 다른지는 많은 유자녀 여성들이 출산 전을 ‘전생 같다’라고 표현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하나 있는 상황과 둘 있는 상황도 옛날 말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를 하나 더 출산하고 돌보려면 양육자의 한정된 건강, 시간, 자원, 에너지를 전부 다시 분배해야 합니다. 아이의 특성에 따라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대개 엄마의 몫이지요. 그러니 결혼도 하지 않고 상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자녀의 숫자부터 ‘계획’하는 남성을 저는 다소 의심스런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이런 판단과 또 별도의 감정이라 한층 더 어려운 일이지만요.

그렇다면 무자녀 삶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합의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딩크는 딩크끼리 결혼해야 한다’, ‘무자녀든 유자녀든 결혼 전에 무조건 합의해야 한다’, ‘결혼 후 마음이 바뀌면 그 사람의 책임(잘못)이다’ 같은 거지요. 여기에 ‘남자라면 누구나 아이를 원한다’, ‘딩크는 나이 들면 이혼하고 남자는 젊은 여자 만나 아이 낳고 살더라’ 같은, 무자녀 여성에게 결격사유라도 있는 것처럼 겁주는 말이 마치 인생의 경험에서 나온 진리처럼 떠돌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이 무자녀 삶에 관해 그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이 지향하고 상상하는 결혼과 부부, 가족의 상이 어떤지를 알려줄 뿐이지요.

누군가를 만나 미래를 계획할 때 서로 원하는 가족의 모습에 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누는 것은 물론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에는 변수가 많고 부부관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교제할 때 무자녀 삶을 원한다고 알려서 자녀 계획이 있던 상대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이 무자녀를 원하는지 잘 몰랐다가 결혼 후 확고해진 사람이 상대와 격렬한 갈등을 겪은 끝에 합의한 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만족하는 생활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줄 알았던 남성이 무자녀 삶을 원하는 여성으로 인해 그 가능성을 고려하고, 그 삶이 자신에게도 생각보다 잘 맞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저는 종종 듣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의 변화도 가능하겠지만, 그 경우에는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입장에 더 무게를 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치스 님께서 그분과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호감을 표하고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적절한 시점에 무자녀 삶에 관한 더치스 님의 입장을 밝히셔야 관계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감정과 관계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기준이나 정답은 없으며 무자녀 삶을 원하는 마음은 ‘단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꼭 그분만이 아니라 앞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시더라도 용기를 내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추신. '나와 내 무릎과 새 수영복과'를 읽고 저의 무릎을 위해 함께 울어 주신 쥬쥬 님, 감사합니다. 도수 치료 선생님께 근력운동 열심히 한 척 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일단 꾸준히 병원에 다니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