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100세로 장수하신 외할머니는 워낙 깨끗하게 살다가 가셔서, 남겨진 이들이 걱정될 뿐 고인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들지 않았어요. 우리 외할머니가 천국 안 가면 누가 가?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으니까요. 장례식장엔 친가, 외가 친척들부터 부모님 지인들이 다 오셨어요. 저희 부부는 결혼 전부터 무자녀를 선언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그동안 부모님으로부터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은 없었으나, 친척들, 어머니 친구분들이 오시자 저희를 붙잡고 다들 애 낳아라 한마디씩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때마다 여자인 제가 아이 생각이 없다는 건 납득 못하시지만, 남편이 아이 싫다, 낳을 생각 없다(남편 생각이 더 확고해요)고 말씀드리면 묘하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수긍하시더라구요. 그런 모습을 보니 이것도 성별 권력 때문인가? 왜 남편의 생각엔 납득하실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참 묘한 경험이었어요. 이런 경험을 해보신 분들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연두 님의 편지를 읽는 순간 떠오르는 기억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쓰면서 만났던 도윤 님과 자현 님의 인터뷰였어요.

“아이를 왜 안 낳느냐”고 해서 “저희는 그렇게 합의했어요”라고 하면 꼭 “남편도 그걸 원해요?” 또 물어봐요. 이때 “남편이 더 원해요”라고 해야 대화가 끝나요. 그게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좀 억울하죠.

신랑이랑 사내 커플로 결혼했는데, 사람들이 애 안 낳느냐고 해서 “한 번도 낳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다들 ‘저 기센 여자 때문에 우리 착한 ㅇㅇ이가 다 맞춰주고 사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더라고요.

자발적 무자녀 여성에 관한 글을 쓰다 보면, 자발적 무자녀 남성에 관한 이야기도 궁금하다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저도 후자에 좀 더 관심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아직 전자가 저에게 더 중요하고 의미 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연두 님을 비롯한 여성들이 놓인 지형 때문입니다. 임신과 출산의 당사자는 여성인데도 출산 여부, 특히 비출산 결정 시에 남성 배우자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 말이지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부부가 비출산에 합의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하거나 믿기 싫어하는 듯합니다. 순한 남자가 “기 센 여자” 때문에 부성애를 발휘할 기회를 포기하고 종족 보존의 본능을 억누른 채 불완전한 가족으로 살다 보면 둘 사이는 예견된 위기에 봉착할 거라구요. 작년 이맘때, <오케이 광자매>(2021)라는 드라마에서 무자녀 여성 이광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숙한 어머니로 ‘교정’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아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여성, 외도를 저질러 이혼하는 무자녀 남성에 대한 인물 소개는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다소 이기적인 공주과며 자존심이 강하다. 변호사와 결혼해 잘 살지만 딩크를 고집한다”, “우유부단하며 변호사답지 않게 순수하다. 광남이 원하는 대로 딩크를 하고 있지만 늘 마음속은 외롭고 아이를 원한다.” 

네, 기 센 여자와 착한 남자입니다. 남자가 너무나 착한 나머지 아이를 갖자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혼외자를 얻는 동안, 감히 아이도 안 낳고 일도 안 하는(광남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싱크 Single income no kid’입니다) 여자는 딱 욕 먹기 좋은 인물로 묘사됩니다. “지 자식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놈이 어디 있겠냐?”, “병원이라도 가보고 노력이라도 해라. 남자 마음 다 똑같애, 멍충아!”같은 아버지의 잔소리는 무자녀 부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을 반영합니다. 자녀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남성의 자연스런 본능이고 여성이 거기에 따라주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겁니다. 그런 말들의 뿌리에는 여성을 남성 집안의 ‘대를 이어주는’ 도구적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있고,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여자는 반인륜적 괴물로 해석되는 거지요.

물론, 엄마가 되지 않으려는 여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빠가 되지 않고 싶어 하는 남성 역시 오해를 받습니다. 성격이나 건강상의 결함, 무능력, 무책임, 재정 문제, 불우한 가정사, 부부간 애정 부족 등 하여간 뭔가 특수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저는 최근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와 이유의 무자녀 삶에 관해 다룬 <엄마 아닌 여자들>(페기 오도넬 헤핑턴 지음. 이나경 옮김)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중 한 무자녀 남성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만들어진 ‘전국 비(非)부모회’라는 단체에서는 몇몇 사람을 비부모 홍보대사로 선발합니다. 그중 ‘올해의 비아버지’로 뽑힌 소설가 댄 웨이크필드는 애초에 상 받기를 꺼렸고 부모가 아닌 삶이 축하할 것인지 비부모가 차별의 대상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일단 무대에 올라 “저는 우주비행사가 될 능력도,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만한 자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기사를 읽은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신문에서 네가 올해의 비아버지로 뽑혔다는 기사를 보고 어땠는지 알아? 가장 친한 친구가 나치라는 기사를 읽은 기분이었어.”

이 대목을 읽다 보니, 언젠가 자발적 무자녀 남성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얼마 전 <시사IN>에 무자녀 삶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발표한 ‘지난 10년간 무자녀 부부의 특성 변화’ 보고서를 중심으로 여러 무자녀 부부의 생각, 그리고 제가 김다은 기자님과 나눈 이야기도 살짝 담겼어요.

지난봄 길 잃은 지렁이들을 보며 저를 떠올려 주신 리콜라 님, 여름을 맞아 지렁이 구조를 시도해보셨나요? 본격 지렁이의 계절이 돌아와 저도 망가진 분무기를 버리고 새로 구입했습니다. 주말부터 비가 계속 내린다던데 지렁이와 여러분 모두의 안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