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에 다녀오자는 계획은 형부의 아이디어였어요. 작년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온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을 다녀오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으셨다더라고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언니가 성인이 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가족 여행은 12년 전 부모님과 넷이서 다녀온 미 서부 패키지 여행이었거든요.

<걸어서 환장 속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방송작가이자 팟캐스트 <비혼세>의 진행자 곽민지 작가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온 스페인 자유여행에 대한 ‘환장할’ 경험을 담은, 정말 재미있고 은근히 눈물 나는 에세이에요. 이 책을 읽었을 때 저는 부모님과 이렇게까지 끈끈한 시간을 보낸 작가님이 멋지고 부럽다고 생각하는 한편, 추진력과 기동력이 바닥에 가까운 저에겐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겐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계획도 운전도 심지어 비용까지도 언니와 형부가 책임진다고 하니 가지 않을 이유를 찾기어렵더라고요. 무엇보다, 부모님이 비교적 건강하신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일단 가기로 했습니다.

첫째 날 아침, 부모님과 언니 부부, 조카들이 탄 렌트카에 올라탔을 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설레는 기분이었습니다. 여행이 엄청나게 재밌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모처럼 새로운 경험이니 혹시 모르잖아요? 숙소에 있는 워터파크에 가기 위해 10년 만에 래시가드도 장만했고 말이죠. 언니와 형부가 손수 구성한 플레이리스트로 차 안에 음악을 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즐거웠습니다. 형부가 결혼식 때 나훈아의 ‘사랑’을 열창해 엄마 친구분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새 조카들이 자라 초등학생이 되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하면서요. 그러나…….

여행이 시작된 지 30분, 아니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저는 깨달았습니다.

맞다, 이래서 미국 여행 때 아빠랑 싸웠지?

아빠는 무척 자기중심적인 분입니다. 자기 말만 옳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금세 짜증을 벌컥 낸 다음 잠시 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해지세요. 제 주변 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한국 노년 남성의 70% 이상에게는 이런 특성이 있는 것 같지만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뒤끝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대가 이미 받은 상처에는 무신경하죠. 다만 딸들에게는 그리 가부장적이지 않고 지극히 헌신적인 분이기도 하셔서, 저는 나이를 먹으며 그런 장점에 좀 더 감사하게 되긴 했습니다. 게다가 지난 10년 간 떨어져 살며 명절이나 생신 때 같이 밥 먹고 반나절 정도 같이 지낸 게 전부이다 보니 아빠의 진면목(!)을 잊고 있던 겁니다.

어떤 얘기가 나오든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평가하는 사람과 같이 지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남진 노래가 나오면 나는 평생 가요라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고(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서 어린 시절 가족 여행 때 듣던 카펜터스 노래를 틀자 사실 나는 별로 이 노래를 안 좋아한다고(그러면서 천 번 넘게 들었잖아요!), 비교적 무난한 프로야구 얘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지금 기아 타이거즈는 옛날 해태 타이거즈를 계승한 팀으로 볼 수 없다고 열변을(제 남편은 타이거즈의 열성 팬입니다)…….

차 안에서도 조카들에게 아침을 먹이느라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제외한 네 사람은  ‘갑분싸 메이커’ 아빠와 어떻게든 좋은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고 또 애썼지만,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은 도무지 이길 수가 없더군요. 저는 매 순간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세상 모든 주제에 입장을 가질 수 있지? 그리고 주차장 정산기를 향해서조차 인삿말 필요 없으니 얼른 문부터 열어달라고 투덜거리는 아빠를 보며 진심…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즐거운 순간도 많았습니다. (갑자기 수습하려는 것 같네요...) 매 끼니 음식이 맛있었고, 다소 모험적 메뉴였던 즉석 떡볶이(속초의 ‘조롱박’이고 동아서점 건너편에 있습니다.)도 8세부터 75세까지 모두 만족했거든요. 기대 이상으로 재밌던 곳은 워터파크였습니다. 대포에서 쏟아지는 거품을 맞으며 환호하는 아이들, 지쳐서 영혼이 사라진 얼굴로 튜브를 타고 유수 풀에 둥둥 떠내려가는 부모들, 워터 슬라이드에서 미끄러져 튀어나오는 순간 나이를 막론하고 활짝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주 신기하고 기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덜덜 떨면서 워터 슬라이드에 올라갔다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신나게 내려왔지요. 내내 비가 내린다던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가 적당히 흐리기만 해서 낙산사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데도 성공하고 부모님과 해수관음상까지 본 것도 좋았구요.

돌아오는 날 출발부터 아빠가 짜증을 내지만 않았다면, 참다 못한 언니가 화를 내고, 그 불똥이 결국 엄마한테까지 튀지만 않았더라면 이번 여행은 상당히 교훈적으로 잘 마무리되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족 영화든 로드 무비든 원래 클라이맥스에선 모두가 서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폭발시키지 않던가요. 물론 현실에선 아빠를 제외한 사람들끼리 아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한껏 예민해졌고 아빠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짐을 푼 다음 언니와 저, 엄마는 가족 단톡방에서 서로를 치하하는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날까지 열두 시간을 내리 잤어요.

사람들이 가족 여행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기대하든 그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될 텐데 말이죠. 분명 좋은 마음에서 시작된 여행인데 누군가는 조금 서운한 마음을, 누군가는 조금 찜찜한 마음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에게 이번 여행은 가족과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압축적으로 공유하는 게 어떤 일인지 가르쳐줬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행 전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아빠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의 몰랐던 면과 의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러니 모든 순간이 평화롭고 즐겁지 않았을지라도 우리가 공통의 기억을 갖게 되었다는 건 언젠가 시간이 흐른 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조금 더 많아질 거란 의미겠지요. 두 번째 가족 여행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안녕히 계세요.

추신. 편지를 다 쓰고 나서야 요일을 하루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번 주 내내 제가 좀 넋 나간 상태였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