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결혼 8년 차 기혼 여성입니다. 동시에 팬섹슈얼(범성애자)이며 폴리아모리스트입니다. 남편이 있고 2년 넘은 동성의 애인이 있어요.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의 집사입니다. 보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저로서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어요.

아이 때부터 아이를 좋아했던 저는 당연히 아이 있는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결혼 후‘공식적으로 아이를 낳아도 되는 상황’에 놓이자 ‘가만있어 보자…. 이게 그냥 그렇게 결정할 일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때부터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1~2년 정도 있었고 <아이 없는 완전한 삶>이라는 책도 읽었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아이 없는 삶을 택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제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낳지 않기로 했어요. ‘이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이에게 좋은가?’를 가장 중요하게 두고 내린 결정이에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도 읽었습니다 ㅎㅎ) 기후위기와 여성혐오, 불평등과 같은 사회문제부터 우리 부부의 경제적인 상황, 여성으로서의 저의 커리어와 삶, 남편을 보호자로서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 등도 모두 따져보았지만 낳겠다는 답이 도무지 나오지 않더라고요. 다들 낳고 산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좋아한다 같은 이유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 후 저는 유기묘로 추정되던 길고양이를 입양하여 남편과 셋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삶에 아주 만족해요. 주위에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더 편한 부분도 있고요. 사실상 저의 삶은 결혼 전과 달라진 게 없...는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인간 입양(성인 입양도 포함)에 대해서는 종종 생각합니다. 누군가 낳아서 이미 태어나버린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일방적으로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함께 가족을 재구성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요. 꼭 거기에 이르진 않더라도 보육시설 봉사나 보호 종료 아동 후원 같은 활동을 시작해보면 좋겠다고 남편과 얘기했어요.

집 밖에서 우연히 만난 아기에게 있는 힘껏 사랑의 눈빛을 보냅니다. 몇 안 되지만 최근에야 주위에 출산과 육아를 시작한 여성들이 생겨나고 있다 보니 그들의 삶에도 관심이 절로 가고 있어요. 엄마는 되지 않았지만 좋은 이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올라요. 아이 없는 삶과 아이 있는 삶이 잘 어우러지고 우리가 즐겁게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험과 생각을 나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네]

그네님의 편지를 받은 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일대일 관계의 혼인인 모노가미에 지극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 다자연애인 폴리아모리의 역동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살다 보니 어차피 세상의 그 어떤 관계라도 완벽하거나 견고하지는 않으며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자신(들)에게 맞는 관계면 좋지 않은가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회에서 제안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에 ‘찬성’ 의견을 등록했어요.)

대부분 여성이 어릴 때부터 ‘예비 엄마’로 상정되며 자라다 보니 스스로도 아이 있는 삶을 당연한 미래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는 게 늘 어려웠던 저조차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혹은 결혼 후, 그네님의 말씀처럼 ‘공식적으로 아이를 낳아도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고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중 어떤 사람들은 계속 아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결정에는 그네님이 예로 드신 것처럼 여러 가지 조건, 상황, 감정이 복합적으로 개입하지요. 아이가 있는 분 중에 ‘생각하다 보면 못 낳는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 말이 때로는 유쾌하지 않게 들리지만 어떠한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에 내 의지와 판단으로 생명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계로 뛰어드는 모험이고 거기엔 큰 책임이 따르니까요. 다만 제 경우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사랑해서는 아니고, 그보다 내가 더 중요해서, 이후 발생할지 모르는 어려움을 감수할 만큼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도의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너무 복잡해서 끝나지 않는 생각이 꼬리를 물다 내린 결정이지요.

사실 저는 아직까지 아이가 있다는 그 자체가 부럽다는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누군가 기나긴 고민 끝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한 번 그 길로 가 볼까?’라고 결정한 것을 보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만큼의 용기가 무척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 삶의 형태나 방식을 지키고 싶은 의지와는 또 다른, 통제할 수 없어 불안한 동시에 예측할 수 없어 기대되고 궁금한 ‘가능성’의 영역이었거든요. 그네님께서 고려 중이셨던 가족의 재구성도, 내 삶과 낯선 존재의 만남이라는 면에서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요. 그사이 혹시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여전히 좋은 이모는 못 되지만 혼잡한 곳에서 조카를 놓치지 않도록 손을 꽉 잡고 걷거나, 우연히 눈이 마주친 아기와 어린이에게 활짝 웃어주는 정도의 이웃으로 살고 있습니다. 얼마 뒤에는 친구가 임시보호 중인 강아지를 며칠간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결혼 후 제3의 존재가 집에 머무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무척 긴장되고 설레고 또 걱정되지만, 저도 아주 약간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두 사람과 개 하나의 무사한 공존이 이루어지길 빌어주세요. 

몇 번이나 속았지만, 이제는 더위가 진짜로 물러간 듯하네요. 

일 년 중 산책하기 가장 좋은 계절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추신. 나비님, 덕분에 저도 이찬혁 씨의 ‘파노라마’를 들었습니다. 좋은 음악과 함께 무사히 회복 중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번 편지에서 소개한 <작은책> 구독을 신청하신 분이 여럿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잡지를 같이 읽을 수 있어 반갑고, ‘없는생활’을 읽으시는 분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