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녀 가족으로서 미래에 대해, 삶의 이런저런 측면에 관해 가장 생각이 많아질 때는 아무래도 병원에서입니다. 얼마 전, 지난봄에 예약했던 검사를 받으러 대학병원에 다녀와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번 여름 크게 다쳐서 한동안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한쪽 발등과 복사뼈가 부러져 핀을 박는 수술을 받고, 깁스하고, 몇 주간 발을 땅에 디디면 안 된다는 선고를 받았지요. 사지 중에 세 개는 멀쩡한 터라 앉아서 일하는 회사 업무는 볼 수 있었는데요, 집에서는 눕거나 앉아있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도 2인 가족이라, 회복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동거인이 잘 보살펴주었습니다. 욕실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의 물기를 닦고, 문 앞에 놓인 배달음식을 매번 들여오고, 손이 닿는 곳에 물컵을 놓아두는 것 같은 일들…. 가만히 있으려니 민망하고 미안하더라고요. 너무 고맙기도 하고, 혼자서 해내야 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르겠어요. (같은 시기에 트위터에서 1인 가구인 한 작가님이 비슷하게 다치신 상황을 보기도 했는데, 동병상련이면서도 정말 대단하시다 생각했습니다).

다친 몸으로 지내니 엄청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40대가 아니라 70대, 80대에 다쳤더라면 - 돌봐줄 사람이 같이 나이 든다는 것 - 그렇지만 날 돌보는 존재를 위해 아이를 가질 수는 없는데 - 휠체어나 목발로는 오르기 어려운 건물 입구에 있는 많은 계단(심지어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해도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 다시 시작된 전장연의 투쟁...머릿속 생각만으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일단 아직 힘이 있을 때 열심히 건강을 저축해야겠다, 내가 나이 들고 더 몸이 불편해지기 전에 많은 복지가 이루어지도록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정도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깁스를 풀고 며칠 지났지만, 아직 계단을 오르내리긴 어려워 지하철을 못 타고 택시로 오가고 있어요. 지하철역에 계단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깨달았네요. 다음 주 메일을 받을 즈음이면 좀 더 회복해서 택시비를 아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 출근해서 읽는 <없는생활> 메일은 마음에 안정감을 줍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리콜라님, 안녕하세요.

발등과 복사뼈가 부러지셨다니 정말 놀라고 아프셨겠어요. 땅에 발을 딛지 않도록 몇 주나 신경 쓰는 생활도 무척 불편하셨을 것 같고요. 다치기 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욕실 바닥의 물기나 현관 앞에 놓인 배달음식, 물컵 하나까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하니 저도 아찔해지네요. 일상의 매 순간 도움받아야 한다면, 돕는 사람도 힘들지만 도움받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고 보면 제가 그동안 아이 없이 살며 편안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돌봄이 제 삶과 꽤 먼 곳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비교적 건강한 성인 두 사람이 같이 사는 일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 분업과 협업의 균형을 맞추기 그리 어렵지 않거든요. 배우자가 요리를, 제가 빨래와 청소를 좀 더 신경 쓰는 식으로 적성에 따라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한 사람이 바쁠 때는 나머지 한 사람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배달음식이 도착했을 때는 식탁에 미리 신문지를 펼쳐 놓고, 한 사람이 문 앞에서 배달음식 봉투를 들여와 포장을 푸는 동안 나머지 한 사람은 수저와 컵을 놓는 식으로 일이 착착 진행되죠. 하지만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이라면 아이를 돌보는 일, 아이에게 먹일 음식을 따로 챙기는 일,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이 더해지면서 아이가 울거나 아프거나 잠들거나 (음식을 던지거나 뱉거나 토하거나) 하는 돌발 상황에도 대처해야 할 테니 균형이 다 무슨 소리겠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효율적이고 편안하다고 느꼈던 그 ‘균형’을 계속 유지하기란 불가능함을 차츰 배우게 됩니다. 일단 작년부터 제 무릎과 손가락 관절이 약해지면서, 제가 할 수 없는 일까진 아니지만 아프거나 불편한 일은 사소한 거라도 배우자에게 도움받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몇 달 전 수술 후에는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힘들어서 밤새 화장실에 갈 때마다 배우자의 부축을 받아야 했는데, 미안해도 달리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 너무 우울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생각하는 문제는, 일상적 돌봄에 익숙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은 돌봄뿐 아니라 의존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 아프지 않을 때, 다치지 않았을 때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건 나의 기질이라기보다 상황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돌봐야 할 존재가 없고, 그로 인해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양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활이었던 거죠. 결국엔 누구나 나 자신, 혹은 가까운 누군가의 돌봄이라는 과제와 직면하게 되어 있는데 말이에요. 실은 지금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일조차 피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해서 배우자에게만 의존하면 우리 둘만의 작은 공동체는 금세 파스스 무너져버릴 테니 답은 역시 가능한 많은 사람과 서로 돌보고 기댈 수 있는 관계망과 시스템을 만드는 거겠죠.

며칠 전, 산업재해로 양팔을 절단한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 오기나 씨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요. 비용을 아끼려 위험한 작업을 지시한 회사 측에 화가 나고, 6년 동안 오기나 씨가 겪은 극심한 고통을 떠올리는 일도 괴로웠지만, 오기나 씨가 음식을 먹거나 땀을 닦아내야 할 때마다 아내 어요나 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대목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여러 해 전 배우자가 발을 다쳐서 가까운 병원까지 제가 부축해 오간 적이 있는데, 평소엔 가벼운 산책 삼아 다니던 그 길이 어찌나 멀고 낯설게 느껴지던지. 내가 건강한 몸에서 ‘탈락’하는 일 못지않게 내 가족이 아픈 것도 무척 두렵고 외로운 일이더라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돌봄과 의존이 한결 편안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나에게도 그런 곳이 되리라는 기대를 걸고 계속 변화할 수 있도록 관심 가지려고 합니다. 리콜라님이 말씀하신 전장연의 투쟁, 모두를 위한 복지까지요. 그리고 부디 이번 주에는 많이 회복되셔서 택시비 아끼실 수 있으셨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시간이 광속으로 흘러, 저의 논문 예비심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 작년에도 올해도 똑같은 얘기를 읽으신 적 있다고요? 그럴 리가요!) 도대체 지난 3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내년 초에는 기필코 졸업해야 하는 관계로 당분간 <없는생활> 쉬어갑니다. 돌아올 때까지 많은 사연 보내주세요. 무자녀 이야기가 아니라도 환영합니다. 하루 열두 시간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저에게 재밌는 얘기 좀 베풀어주시길.

다가오는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안녕히 계세요.

추신. 수박의 계절이 끝나 저는 오늘 복숭아 한 박스를 샀습니다. ‘황귀비’라는 품종의 황도인데, 백도파인 제 입맛에도 맞을 만큼 과육이 단단하고 달아서 성공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