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엄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로 아빠가 전화할 때마다 “나만 손주가 없다”, “심심한데 할 게 없다”, “낳기만 하면 다 도와준다”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어요. 아빠가 느끼는 공허함은 이해가 가고, 그 세대의 아빠들은 당연히 자녀가 결혼하면 손주를 보겠거니 하는 생각의 플로우로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감정이 상하지 않게 대처하는 것이 정말 어렵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어제는 저와 제 동생이 없었으면 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딩크는 50대부터 후회한다는 얘기까지 해서 제 마음도 너무 괴로웠는데 어떻게 하면 이 갈등 상황을 유연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조언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더 이상 내 인생에 큰 변수를 늘리고 싶지도 않고, 회사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는 얘기들로 대응하는데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 고민입니다.

하마님의 편지를 받기 전날, 저는 엄마와 전화 통화하다 길 한복판에서 버럭 짜증을 내고 말았습니다. 아이 얘기는 아니었지만, 엄마의 기준에서는 저를 위한 조언이라도 저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렇게 원하지도 않는 일을 자꾸 제안하셨거든요. 참았던 예전 얘기까지 끌어들여 제 입장을 관철한 다음 전화를 끊고 나니 내내 마음이 좋지 않더라고요. 이틀 뒤부터 엄마와 다시 일상 카톡을 주고받긴 했지만, 가끔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내가 또 언젠가 후회할 짓을 했구나 하고요.

오은영 박사님이 말씀하셨다지요. 양육의 목표는 독립이라고요. 자녀가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듯, 부모도 자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저도 머리로는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상황이 조금씩 바뀌다 보니, 독립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는 것 같은데, 공부를 좋아하지도 않는 제가 충동적으로 대학원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의 불안이었습니다. 기질적으로는 저와 흡사한데도, 거의 평생 한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셨던 아버지는 ‘프리랜서’를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마흔도 되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는 딸의 미래가 너무 걱정스러웠던 나머지 제 삶 전반을 못마땅하게 느끼셨던 거죠. 몇 번의 다툼 끝에 저는 아버지의 불안을 깨달았고, 저에게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단 대학원이라는 맨땅에 다이빙하기로 했습니다. 그 세대 많은 부모님이 그러하듯, 아버지는 학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분이시라 제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고 어쩌면 뭔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한동안 안도하시더군요. 물론 제가 졸업하고 나면 다시 불안해하시겠지만, 그렇게 서서히 자식이란 영 뜻대로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셔야겠죠.

석사를 졸업한 다른 무자녀 여성과도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대학원에 갈 수는 있지만(물론 그분은 부모님을 위해 가신 건 아니었어요) 애를 낳아드릴 수는 없다고요. 사람마다 부모와 맺는 관계가 다르고 감정이 다르겠지만, 부모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더라도 그분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내가 해드릴 수는 없음을 인정하고 선을 그어야만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괴로움이 발생하더라도요.

다만 하마님의 어머님께서 재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층 복잡합니다. 배우자를 잃는 것은 저도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거든요. 물론 부모님을 잃는 것도 늘 두렵지만, 내가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수십 년 동안 한 집에서 일상을 함께 해온 상대가 없어진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사별을 잘(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지금으로선 저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어머님 없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나날을 보내시는지는 아마 본인만 알고 계시겠지요. 자녀가 가장 가깝게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다 알 수 없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부모님 대부분은 조부모 역할을 노년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역할로 생각하시니, 배우자도 손주도 없는 경우에는 주위 사람과 일상적 대화 나누기도 상당히 어려우실 것 같아요. 심심한데 할 게 없으시다는 것도 그런 상황의 외로움과 무료함에 대한 토로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효도폰처럼 손주를 안겨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요.

하마님께서 어떤 경로를 거쳐 무자녀로 살고 계시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아버님과 솔직한 대화가 가능하시다면 이 결정의 맥락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지금의 삶에 아이를 더하는 것이 버거워서라는 것보다,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어서 이 길을 가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좋은 점이 있을 거라고요. (사실 자녀가 없으면 부모님을 위한 시간적·정서적 여유를 좀 더 가질 수 있으니 아버님께도 좋은 면이 없지는 않겠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함께 떠나보냈고, 우리에게도 남은 시간은 유한하며, 나는 지금으로선 생각을 바꾸지 않을 테니 아버지가 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전제로 잘 지내고 싶다고요. 말로 꺼내기 어렵다면 편지를 써보셔도 좋겠습니다. 만약 아버님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시더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시길 바라요. 내 손을 떠난 일까지는 어쩔 수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생분과, 아버님의 일상에 지속적인 활기를 불어 넣어드릴 방법을 논의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꼭 온 가족 해외여행 같은 거창한 이벤트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저는 작년 여름 이후 가족여행만은 계속 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 내게 마음을 쓴다고 느끼는 순간의 자잘한 기억들이 우리를 계속 살게 하잖아요. 시간을 보낼 새로운 취미를 찾아드리거나, 어떤 경험을 함께 하거나(저는 엄마랑 변호사 사무실 찾아간 날이 기억에 오래 남더군요), 깜짝 선물을 드린다거나(저는 아버지에게 가끔 엄마 몰래 과자를 드립니다) 같은 것들요. 아버지의 현재 뿐 아니라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 등 인생 전반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구요. 

사실 논문 예비심사일이 정해져 제 발등에 떨어졌던 불이 가슴 위까지 올라왔지만, 어쩐지 이 답장을 얼른 써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마님의 편지를 읽으며 떠오른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사회학자인 기틴스는 1980년대 영국 사회에 확산된 ‘가족의 위기’ 담론을 반박하며, 기존의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가족(the Family)’ 개념은 특정 시기의 지배 세력이 강요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실제의 가족은 역사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형성하고 해체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양한 ‘가족들(families)’ 이라는 거죠. 그러니 내가 나고 자란 가족과 내가 만든 가족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 사람이 소수의 자녀만 갖거나 자녀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두 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함을 의미한다. 교육과 열망, 그리고 정서적 요구와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투자’한다. (...) 오늘날 이러한 요구들은 한두 명의 자녀에게만 부과된다. 한 자녀가 상속자, 보호자 및 정서적 지지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가부장 가치의 지속, 그리고 자녀의 경제적 유용성의 상대적 감소 때문에 이런 ‘요구’ 중 많은 것은 딸이나 며느리에게 부과되기 쉽다. 딸들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 아마도 이 같은 이유로 많은 여성이 부모가 그들에게 맡긴 무거운 정서적·부양적 요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며, 자신의 가족을 만듦으로써 그들이 독립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와 요구의 동일한 순환을 영속화한다.

- 다이애너 기틴스 <가족은 없다: 가족 이데올로기의 해부> p.166]

날씨가 부쩍 추워지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이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연말쯤 돌아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