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가 없는 동네에 산다는 것은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라고 그곳을 떠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시 경계를 지나서도 차를 한참 달려야 나오는 반월공단 인근 부지에는 아버지의 직장에서 지은 32가구짜리 다세대주택 한 동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자가용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시장에 가려면 노선이 하나뿐인 버스를 타야 했지만 그나마도 자주 오지 않았다. 대신 일주일에 한 번 “계란~이 왔어요. 싱싱하고 맛있는 계란~이 왔어요”라는 방송과 함께 트럭이 왔고, 과일과 야채, 생선을 파는 트럭도 가끔 들렀다. 물론 나를 포함한 동네 아이들이 가장 반기는 사람은 역시 야쿠르트 아줌마였다.]

다섯 살 무렵부터 열 한 살까지,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긴 시간이 아닌데도 제 마음속에는 늘 ‘우리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십여 년 전에 떠나온 그곳에 다시 가 보기로 했어요.

일정보다 몇 시간 일찍 지하철역에 내렸습니다. 물론 제가 살 때는 없던 역입니다. 출구로 나오자 빽빽한 신축 아파트 단지가 펼쳐졌어요. 압도적인 변화에 멈칫했지만, 지도 앱 덕분에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교차로에 이르자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철로 옆 공터가 된 곳은 예전에 논이었는데 겨울에 물이 얼면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어요. 머리 위로 만국기가 나부끼고 주황색 천막 안에서는 떡볶이와 오뎅 같은 간식을 팔았습니다. 운동신경이 절망적일 만큼 없던 저는 스케이트를 빌려 신고 얼음에 발을 내딛자마자 발목을 삐는 바람에 구경만 했지만, 빙판 옆에서 옥수수기름에 구워 팔던 쥐포를 처음 먹었을 때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 하고 감동했지요.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점점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동네라 왜 낯선 사람이 돌아다니느냐고 붙잡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명할지 고민했지만, 뭐라 말해도 수상해 보이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다행히, 그리고 의외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작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친구들과 숨바꼭질이나 잡기 놀이를 하느라 수천 번 정도 뛰어내렸던 벽돌담장이 보였어요. 그 주황색 벽돌은 무척 유용했습니다. 소꿉놀이할 때마다 자갈로 모서리를 깨뜨려서 빻은 다음 고춧가루로 쓸 수 있었거든요. 우리가 ‘뒤뜰’이라 불렀던 건물 뒤쪽 공터가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했지만, 인적이 너무 드물다 보니 왠지 넘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제 기억 속의 뒤뜰에는 토끼풀밭과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공업용 시설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금지 구역 근처에 있던 기름통에 손을 넣은 적이 있어요. 아니,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수돗가에서 아무리 손을 씻어도 새까맣고 끈적끈적한 기름이 지워지질 않는 바람에 평생 까만 손으로 살게 될까봐 울며불며 집으로 달려가던 일곱 살의 저에게 묻고 싶네요.

모래를 파며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를 부르던 놀이터 바닥은 모래가 아니라 풀밭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왔던 한겨울 어느 날, 저는 귤을 까서 외진 곳의 눈 속에 파묻고 다음 날 사각사각하게 얼어 있는 귤을 꺼내 먹으며 이런 게 책에 나오는 ‘셔벗’의 맛일까 상상하기도 했어요. 초여름이면 연보라색 폭포처럼 꽃이 피었던 등나무 벤치에는 여전히 잎이 무성했고, 집 앞에 있던 단풍나무는 그사이 아주 굵어져 있었어요. 단풍나무를 보니 언젠가의 여름, 1층이었던 저희 집 베란다를 넘어왔던 도둑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근처 공장에 다니는 청년이었는데 술에 취한 채 술을 더 찾으러 들어왔다고 했던 것 같아요. 슈퍼가 없는 동네에 산다는 것은 역시…….

동네를 둘러싼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봤을 때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덟 살 때부터 함께 살았던 할머니 생각이 났거든요. 할머니는 그 야산에 정성스레 텃밭을 가꾸셨습니다. 고구마, 호박, 땅콩, 토란, 가지, 토마토 등 수많은 작물을 심으셨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노후를 보내게 된 할머니에게 그 땅과 그 일이 얼마나 소중했을지를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기억이 쏟아졌지만 사실 제가 그곳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하나뿐이던 버스 노선은 셋으로 늘어 있었지만, 배차 시간을 확인하곤 그냥 걷기로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모여 학교에 가던 그 길은, 어른이 된 저에게는 이제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돌아오고 나서 문득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조금 더 찬찬히 보고 올걸. 사진을 더 많이 찍을 걸, 영상도 남겨둘걸.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도 그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장소에 다시 한번 가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제 추억의 빛깔은 좀 더 선명해졌거든요.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지난 편지에서 아이 없는 삶에 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제 생각보다 많은 분이 답을 보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지부터 시작해서 번갈아(편지 한 번은 아이 없는 삶에 관해, 한 번은 이런저런 제 일상에 관해 쓰고 있어요.)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단에 링크를 소개해둘 테니 계속 이야기 들려주시면 반갑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