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택배 받을 때보다 설레는 순간은 ‘없는 생활’ 구글 폼을 클릭해 여러분이 보내주신 질문이나 이야기를 확인할 때입니다. 짤막하지만 수많은 감정이 응축된 글도, 그동안의 고민과 지금의 삶에 관해 아주 상세하고 솔직하게 써 주신 글도 모두 저를 웃게 하거나 종종 눈물이 핑 돌게 만듭니다. 그중 어떤 이야기부터 나누어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결혼이라는 선택을 앞둔 여성들의 고민에 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30대 중반 여성입니다. 2년 넘게 교제한 남자친구는 저를 만나기 전까지 ‘가족=부모와 아이가 1명 이상 있는 형태’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임신·출산·육아는 충분히 선택 가능한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나서야 아이 없는 결혼 생활에 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서로의 부모님을 만나 뵙고 나서도 남자친구는 여전히 아이 문제를 결정 내리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저와의 결혼을 원하고, 저를 반려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 저를 따르겠다는 입장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2년 동안 아이 없는 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 이유와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였고, 남자친구도 제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이해한다고 하더군요. 다만, 본인은 여전히 확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본인이 아이가 있는 삶을 원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최근에는 이 문제를 몇 년 후에 결정하기로 미뤄도 된다는 쪽으로 결론 내린 것 같아요. 하지만 저로서는 남자친구가 여전히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제가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이 문제가 태풍이 되어 돌아올까 두렵고, 관계가 풍비박산 나지 않을까 무섭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늘 비슷합니다. 네 입장은 잘 이해했고, 본인이 더 생각해보겠다고요. 이 사람과의 결혼, 정말 괜찮을까요? 결국 아이 문제로 다투고 서로를 상처 입히게 되진 않을까요?

- 헤이나]

세상에는 결혼이 출산의 동의어라고 여기는 사람과, 그 각각은 다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전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다면, 최근 몇 년 사이 후자가 급속도로 늘고 있지요. 후자 중 아이 없는 삶을 원하는 마음이 확고한 사람은 대개 헤이나 님처럼 결혼을 고려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상대도 그러한 삶에 관해 상상해보고 입장을 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저는 아이 문제를 꼭 결혼 전에 뚜렷하게 ‘합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얘기하도록 할게요.), 결혼 전 이 주제에 관해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성의 치열한 고민과,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가 포함된 가족이 ‘생길’ 거라 여겼던 남성의 막연한 바람에 같은 비중을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맞지만, 임신·출산·육아와 관련된 무수한 변수와 위험요소는 대부분 여성이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관해 남성이 충분히 진지하게 고민한 다음에도 그 전처럼 아이를 ‘원할지’ 궁금합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여성의 선택은 별개의 문제지만요.

[어렴풋이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은 가족의 완성이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시간을 두고 얘기를 해보자, 대강 갈무리했지만, 우리의 의견은 늘 평행선. 솔직히 말하자면 미래 가족계획에 대해 남자도 의견을 가질 수는 있지만, 본인 몸 상해가며 낳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왜 내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지(이게 이해의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왜 나는 내 가치관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려 하고 있지? 그런 생각에 이제는 자꾸만 화가 납니다. 제일 화가 나는 건 혹시라도 이 문제로 지금 만나는 사람과 헤어졌다가 나중에 내 마음이 바뀌어 후회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는 저 자신인 것 같아요. 이런 생각에 괴로울 때면 정말로, 제가 여자라는 사실이 싫을 때마저 있어요.

늘 한결같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이기도 한데, 지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저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끝이 보이는 관계라면 차라리 더 빨리 그만두는 게 나을까요? 내 몸과 내 인생에 관한 결정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요?

- 비밀]

헤이나 님과 비밀 님은 아마도 서로의 복잡한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상황에 놓였던 적은 없지만, 근원적으로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으로서 저도 이 불안과 괴로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아이 문제가 태풍이 되어 돌아올까 두려운” 헤이나 님의 마음도, “혹시라도 이 문제로 지금 만나는 사람과 헤어졌다가 나중에 내 마음이 바뀌어 후회하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에게 화를 내는 비밀 님의 마음도요.

그런데, 무엇이든 당장 결정할 필요가 없거니와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게 끝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얼른 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고(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의 상대가 내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은 아닐 겁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지만, 누군가와 인생을 함께 해보기로 한다면 상대가 나의 인생을, 욕망을, 자유를, 가능성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조금은 냉정하게 따져 보셨으면 합니다. 내가 이토록 무겁게 고민하는 문제를 상대는 얼마나 치열하게 파고들었는지, 나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요.

그리고 혹시 언젠가 결혼을 하신다면, 결혼 생활이 평온하고 즐겁게 유지되면 좋은 일이지만, 저는 결혼이 그 자체로 영속성을 갖거나 절대 깨뜨릴 수 없을 만큼 신성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비롯해 결혼 후 아이 없는 삶을 점점 뚜렷하게 지향하게 된 사람들도 있듯, 이 사람과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함께 지내며 내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나는 여전히 아이를 원하지 않고 상대는 시간이 흘러도 계속 아이를 원한다면 그때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을 수도 있고 상처입을 수도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의 형태를 알고 지켜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아이를 갖느냐 마느냐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내가 원하는 나로서 살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하든 스스로 충분한 시간을 주시고, 어떤 경우에도 돌아 나올 길이 있음을 믿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로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지 마세요. 이야기 나누어 주신 두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10월 29일 일어난 참사 이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종종 눈물이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 깊은 슬픔과 분노를 그에 맞는 자리로 보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추신

지난 편지를 읽고 안산에 관한 추억을 들려주신 현우 님, 반가웠습니다. 말씀하신 일들이 있을 때마다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답니다. 언젠가 안산에 다시 들르시게 된다면 추억과 기쁘게 마주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