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80년대 후반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중앙현관 위에는 큰 글씨로 ‘반공’이라 적혀 있었고, 교정에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반공’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배우지 않았어도, 그건 아마 이승복 어린이가 북한군의 위협 속에서도 외쳤다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와 비슷한 의미일 거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지금처럼 읽을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저는 학급문고로 비치된 어린이용 반공 교육 도서를 빠짐없이 읽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이가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이 많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거든요.

‘북송사업’이라는 말을 처음 본 것도 그때였습니다. 일본에서 단란하게 살던 교포 가족이 김일성의 거짓말에 속아서 큰 배를 타고 북한으로 갔는데 그들을 기다린 현실은 감시와 억압, 가족과의 이별이었다는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저는 그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중 어떤 사람들은 북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가족을 떠나거나 떠나보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거든요.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본 것은 약 1년 전입니다. 영화제에서 보고 싶던 영화가 금세 매진되는 바람에 실망하고 있다가 시간표에서 이 독특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전에 양영희 감독의 인터뷰(링크)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다큐멘터리에는 배우 아닌 사람이 등장하고, 그들은 돈도 안 받아요. 영화가 끝나도 그 사람들은 계속 삶을 삽니다. 영화로 인해 여러 평가를 들을 텐데 그중에는 듣기 싫은 소리도 있잖아요. 인물들의 보석 같은 말들도 시나리오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에서 나온 겁니다. 그 삶과 말을 모아 결과가 좋으면 상은 감독이 받아요. 그게 참 뻔뻔하다는 자각이 다큐 감독에게 있어야 합니다. 설령 범죄자를 찍을 때도 그 삶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있어야죠. 내 아버지, 어머니의 사상은 틀리지만, 난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경의를 버리지 않습니다.”

- 2021년 9월 8일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

누군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냉철하게 자신을 바라보다니, 이런 사람이 만든 영화가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보러 간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정말 강렬하게 마음을 흔드는 영화였어요.

양영희 감독은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코리안 2세입니다. 세 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영희’가 일곱 살쯤 되던 70년대 초반 모두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갑니다. 자원한 오빠도, 지명된 오빠도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분단 이후 재일조선인 사회 역시 ‘남한=민단’, ‘북한=조총련’이라는 도식으로 대립 중이었던 데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진학과 취업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이니까요.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오빠도, 지휘자의 꿈을 포기했던 오빠도 ‘지상낙원’이라던 그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도 가족들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열성적인 조총련 활동가였기에 ‘귀국’을 반대할 수 없었고, 중학교 3학년에서 대학교 1학년에 불과했던 오빠들에게도 자신의 삶에 관해 숙고하고 선택할 자유가 없었으니까요.

부모님의 하나뿐인 아이로 남겨진 지 11년이 흐른 뒤에야 영희는 북한을 방문하게 됩니다. 오빠들을 만나고 싶지만 그들의 슬픈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게 너무 괴로워 “이제 더는 오지 말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수차례 북한을 찾아갑니다. 조카가 태어난 뒤부터는 가족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디어 평양>(2005)이 공개된 후 조총련은 양영희 감독에게 사과문을 쓰도록 강요하고, 그가 무시하자 북한 입국을 금지합니다. 양영희 감독은 2005년 방북을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되지만 굴하지 않고 2009년 <굿바이, 평양>을 공개합니다.

한 달 전 개봉한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는 오빠 한 명이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병석에 누운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 씨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제주도에 살았던 어머니는 평생 4.3사건에 관해 말하기를 두려워했지만 언젠가부터 끔찍한 학살을 보고 들은 생존자로서의 증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강인했지만 점점 노쇠해져 가는 어머니가 자신이 떠난 뒤 일본에 혼자 남겨질 딸을 걱정할 때, 거짓말처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양영희 감독과 교제 중인 일본인 저널리스트 아라이 카오루 씨가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사카로 찾아온 거죠. (이 촬영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얼마 전에 출간된 양영희 감독의 책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저는 감독님이 카오루 씨에게 “앞으로 당신과 내 관계가 달라지더라도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고 저작권은 나에게 있을 거야.”라고 미리 선언하신 대목에서 그 철저한 다큐 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제목의 ‘수프’는 두 사람의 첫 만남 때 강정희 씨가 대접했던 닭백숙을 의미합니다. 좋은 닭과 알이 굵고 고운 마늘을 잔뜩 넣어 다섯 시간 동안 고아낸 이 백숙의 조리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위가 된 아라이 카오루 씨가 전수 받습니다. 생전 딸의 파트너로 “미국 놈, 일본 놈은 안 된다!”던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도 아마 그들이 함께 닭백숙을 만드는 모습을 본다면 화내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에 관해 쓰지 않고 영업을 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네요. 저는 그냥,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와 만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이고, 양영희 감독님이 참여하시는 행사도 종종 열리니 혹시 아직 안 보셨다면 보시기를,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기회가 생길 때 꼭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는 역사의 무자비함,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가사의함, 이데올로기가 휩쓸고 간 자리, 기억, 가족,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한 해의 끝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 마음이 바빠지는 시기입니다. 게다가 요즘 난방비가 올랐다고 해서 난방을 켤 때마다 불안에 떨고 있어요. 저를 포함해 수족냉증 있는 사람들은 손발이 차가워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도록 합시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