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또 미루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우선 변명하자면, 우리 미루는 사람들도 할 땐 합니다. 비록 그게 보통은 마감 임박해서고, 말 꺼낸 뒤 짧으면 반년에서 길게는 수년 이상 지난 다음이라 할지라도요.

제가 수영에 도전하겠다고 한 건 지난봄, 무릎 연골 손상 진단을 받은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몇 주는 병원에 다니느라, 그다음엔 기말 과제 마감 시즌이라, 7월에는 졸업 자격 취득을 위한 영어 강의 수강 때문에(네, 저는 결국 토익 합격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8월에는 논문으로 인한 중압감과 무기력으로 인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수영장에 다닌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라 물에 뜰 자신도 없었고, 매달 강습비용도 걱정이고, 수영장 텃세라는 것도 있다던데 이 모든 문제와 마주하는 게 두려웠거든요.

그러나 저에게 수영복을 보내주었던 친구 J만은 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대에 시작한 것 중 가장 잘한 일이 수영이라는 J는 이사할 때도 집 근처에 수영장이 있는지를 1순위로 보고, 출근 전 새벽 6시 수영 수업에 다녀오기 위해 밤 10시에 자는 사람입니다. “수영하고 나면 충족감이 반나절은 가.” “아침에 수영하면 집중력이 높아진대.” “그러고 보니 너 언제 수영 시작할 거니?” “수모는 여기가 괜찮아(링크)” “수경은 이걸 추천(링크)” “만약 너네 수영장이 염소수라면 이 샴푸와 바디워시 써봐(링크)” 기초체력이 좋아서일까요. 수영인은 과연 집요하더군요.

그렇게 살짝살짝 등 떠밀리며 하루는 수모를 주문하고, 하루는 수영장에 들러 등록에 관해 알아보고, 하루는 3부 수영복에 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J가 준 수영복은 좀 작은 느낌이 들었는데, 원래 그렇게 입는 거라는 얘기를 들어도 왠지 나만 엉덩이가 네 개인 사람처럼 보일까 봐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새 수영복을 샀어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는 다양한 길이와 컷의 수영복이 나와 있더군요. 그리고 마침내 8월이 끝나기 직전, 수영장에 등록했습니다. 첫 수업 전날엔 J가 적어준 수영장 이용 규칙을 정독했어요.

1. 센터에 입장하면 카운터에서 탈의실 키 같은 걸 줌
2. 탈의실에 들어가 신발은 신발장에, 사물함엔 벗은 옷을 넣고 수영복과 샤워용품을 담은 가방을 들고 샤워실에 들어감
3. 샤워실 관물대 같은 곳에 가방을 놓고 샤워용품과 수영복을 빼서 샤워대로 감
4. 샤워, 샴푸, 양치하고 수영복 입고 가방 안에 샤워용품 넣어두고 수영장 입장!
5. 첫날 가서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있는 풀 안에 들어가 기다리면 선생님이 옴. 이름 확인하거나 체조하면서 시작
6. 수업 끝나면 다시 샤워실로 가서 샤워하고 샴푸나 바디워시로 수영복도 대충 세탁하고, 수영복 탈수기 쓰려면 쓰고 나와서 탈의실에서 옷 입고 끝!

낯선 곳에 가면 긴장하는 내향인에게 예습은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러운 척, 물론 곁눈질을 정신없이 하면서도 제 시간에 수영장에 입장할 수 있었거든요. 바디워시를 샴푸로 착각하거나, 자유수영 레인이 초급반인 줄 알고 한참 사다리 주위를 서성이며 눈치를 보긴 했지만요.

실내수영장 특유의 냄새를 맡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초등학교 여름 방학마다 수영을 배웠는데, 운동신경이 없는 데다 물을 무서워했던 탓에 그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매년 똑같이 초급반에서 시작하고 끝나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머리를 물에 집어넣길 주저하지 않을수록 몸이 떠오른다는 사실이었어요.

커다란 체격에 우렁찬 목소리로 초급반 열다섯 명을 담당하는 강사님은 과연 겁 많고 말 많은 회원들을 대하는 일에 최적화된 분 같았습니다. 제가 첫날부터 물에 뜬다는 이유만으로 “오, 천잰데~”라고 칭찬해주셨거든요. 한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장된 칭찬인데도 웃음이 났어요. 어른이 이런 기쁨을 얻으려면 어디든 돈을 내고 다녀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목욕탕에서도 그러하듯 사람이 조금 헐벗고 홀딱 젖어 있다 보면 옆 사람에게 말 걸기가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초급반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다들 고만고만하게 못 하면서도 서로 “잘하시네요~”라는 덕담을 나누어 줍니다. 제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분은 아이들이 초등학생인데 올여름 물놀이 갔을 때 자신만 수영을 못하니 재미가 없어 배우러 오셨다 하고, 제 뒤에 계시던 분은 저처럼 지인의 강력 추천으로 처음 수영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물이 너무 무섭다며 울상을 지으셨어요.

수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멋지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주 3일과 가격 차이가 별로 안 난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주 5일 강습을 신청한 나머지 일단 매일 오전에 일어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사이 샤워실 사용법에도 익숙해져서 붐비는 시간대를 피하기도, 새로 온 분에게 이 샤워기는 고장이라고 알려드리며 혼자 으쓱하기도 합니다. 물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조금 겁이 나지만, 막상 풀에 몸을 담그고 나면 수압을 버티고 물의 저항에 맞서 손발을 퍼덕이느라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비록 25m를 한 번에 가지 못해 중간중간 멈춰 서고,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그동안 마신 염소수가 500ml는 될 것 같다 하더라도요. (참고로 저는 아직 손에서 킥판을 떼지 못했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엔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잡니다. 기절하듯 잠드는데도 몸이 물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에요. 매일 낮잠을 자다 보니 오전 수영에 다녀와 점심을 먹고 맑은 정신으로 논문을 쓰겠다던 애초의 계획(이라 쓰고 망상이라 읽는다)과는 너무 멀어진 것 같지만, 그전에도 느지막이 일어나 샤워하기를 영원히 미루며 멍하니 시간 낭비했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수영을 기점으로 하루가 조금 길어진 기분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과 낮의 햇빛을 본다는 것,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 나이든 여자들이 서로의 안부와 건강을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저에게 생긴 작은 즐거움이에요. J는 수영이 인생의 도파민,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행복감을 준다고 말했는데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새로 만난 이 세계가 생각보다 마음에 듭니다.

오전 수업이 끝날 때쯤 되면 분홍색 꽃무늬 수모를 맞춰 쓰신 할머니들이 줄지어 수영장으로 들어오십니다. 아쿠아로빅 수업이 시작되거든요. 덕분에 샤워실까지 흥겨운 트로트가 울려 퍼지는데 어제는 ‘한 많은 대동강’, ‘아! 대한민국’, ‘풀잎 사랑’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아쿠아로빅을 수강할 나이가 되면 ‘캔디’나 ‘다시 만난 세계’ 같은 노래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조금은 기대가 되네요.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지난번 편지인 ‘둘이서 뭐 하고 노세요?’에 답장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아이 없는 다른 부부들이 어떻게 함께 여가를 보내는지 알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없는 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사연 보내주신 리콜라 님, “둘이 사는 것의 재미는, ‘죽이 맞으면서도’ 서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씀에 매우 동의합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한석규 영화제(소파에 누워 <초록물고기>-<접속>-<8월의 크리스마스> 연속보기) 개최는 너무 멋진 아이디어네요. <아들과 딸>,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 씨의 연기를 다시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재미있답니다. <아들과 딸>에서 한석규 씨는 당대 여성들이 꿈꿀 수 있었던 가장 완벽한 남성상을 연기했고, 바로 이듬해 출연한 <서울의 달>에서는 사랑하기엔 너무 한심하지만 끝까지 미워할 수도 없는 남자를 보여줬거든요. 저는 특히 <서울의 달>에서 영숙(채시라)과 홍식(한석규)을 볼 때마다 인간이란 뭐고 사랑이란 뭘까...라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게다가 결말에 이르면...아니, 또 끝없이 떠들게 될 것 같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작품은 웨이브에 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