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책은 지금도 괜찮다는 위로가 되었어요. 커뮤니티에서 ‘결혼하기 전에 진작 협의가 되었어야지 상대방은 무슨 죄냐…’ 같은 글을 보면 죄책감(?)이 들어야 하나 싶었거든요.

졸업 전에 취업했고, 그래서 또래보다 경력도 있고, 이직해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회사에 왔는데, 이제는 내 맘대로 사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사고, 저축해도 될 만큼 돈을 버는데, 2세를 낳아서 희생해야 하는 삶이 다가오면 억울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또 취업·이직·결혼 등 누구보다 평범하고 약간은 이른, 주류의 삶을 살았던 저에게 무자녀 기혼은 비주류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더군요.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신혼은 이제 다 즐겼지 않냐, 출산은 어릴수록 좋다” 하는 주변 또래들의 말 또한 반감이 들게 합니다. ‘키워 줄 것도 아니면서, 평생 가지고 갈 책임을 생각 없이 결정하는 너네가 신기한데….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취업했던 목표는 결국 아이였나? 내가 눈 딱 감고 애 낳으면 부모님도 남편도, 같이 공동 육아하자고 하는 친구들도, 나 빼고 모두 해피 엔딩인 건가?’

아직은 확고한 딩크가 아니기에 이러한 고민이 스트레스가 되는 나날입니다. 둘이서 살면 여유로울 만큼은 벌지만 사실 2세한테 해줄 건 끝이 없기도 하고, 조금 더 좋은 환경에 집은 마련해둬야 쾌적한 환경에서 살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고민을 하는 제가 더 책임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저에게 공감하는 이도 주변에 없어서 이야길 나누고 싶어 길게 적어 보내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익명이 님, 추석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어르신들의 출산 권유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크지 않으셨기를 바라면서도 걱정이 앞서네요. 보내주신 글을 읽으며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 이유는, 익명이 님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현재 익명이 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친인척, 친구, 그리고 배우자마저도요.

여성이 ‘지금’, ‘여기서’, 혹은 ‘계속’ 엄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꽤 많은 수의 선택적 무자녀 여성을 인터뷰하며 이들의 삶 전반에 관해 들었습니다. 인터뷰 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었지만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디어에서는 늘 ‘아이 낳지 않는 여자들’의 공통점을 궁금해하지만, 막상 제가 빠져드는 지점은 이 각각의 사람들이 가진 차이입니다. 이 사람들은 왜, 언제부터 무자녀 삶에 관해 떠올리고 고민하고 결정했는지, 결혼이라는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배우자와는 어떻게 소통하고 합의에 이르렀는지 혹은 여전히 갈등하는지, 외부의 출산압력에 대응하는 전략은 무엇인지 등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이것은 우리 삶 전체와 연관된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 과정에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우리 사회는 엄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여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어요. 그것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계적으로 손꼽히게 낮은 출산율로 미루어 볼 때 여기에는 분명 우리 사회의 특수성이 작용하겠지요.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게 당연한데, 갑자기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한다는데, 그렇다고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애 낳는 꼴은 못 보겠으니 넘어가고, 그런데 이 여자는 결혼도 했으면서 왜 애를 안 낳아? 무슨 문제 있지? 로 요약되는 사고의 흐름 속에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기혼 여성은 불신당하거나 오해받거나 폄하되는 등 왜곡된 프레임을 통해서만 해석되고 존재합니다. 다수의 선택적 무자녀 여성이 이런 시선 속에서 고립되고 불안을 느끼고 ‘이런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라며 자책하게 되죠.

학교에 다니고, 일찌감치 취업하고, 이직해서 경력을 쌓으며 돈을 벌고 결혼하고, 익명이 님은 아마도 무척 성실하고 숨 가쁘게 살아오신 분 같습니다. 사실 퇴근하면 가만히 누워있고 싶은 마음은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게다가 지난 2년 동안은 결혼으로 인한 여러 변화에도 적응하셔야 했을 거고요. ‘결혼 전 자녀 문제를 완벽히 협의했어야 한다’라는 말은 제법 공정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그냥 결혼에 딸려오는 수많은 변수를 외면한 채 던지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수많은 ‘충고’는 결국 ‘모성애’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한 인간으로서 여성이 갖는 다양한 욕망을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하나의 방향만을 제시합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든 어떤 삶을 꿈꾸든 일단 아이를 낳아라. 그리고 거기에 너의 삶을 맞춰라. 어차피 너는 그 길을 가게 될 테니 미루지 말고 깊게 생각하지도 마라. 쓸데없이 시간 끌다간 엄마가 될 기회를 영영 박탈당하고, 네 인생은 미완성으로 남게 될 테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남들의 ‘말’일 뿐, 나를 제일 잘 알고 내 삶을 책임질 사람은 나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이고, 지금 인생의 파트너이자 어쩌면 양육이라는 긴 프로젝트를 함께 할 파트너가 될 배우자와 사이좋게 지내며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 관해 각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계속 함께 하는 것은 가능한지.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건 거창하고 추상적인 비전은 아닐 거예요.

난다 작가님의 만화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제가 무척 좋아하는 대목은 “결혼과 아기가 당연히 세트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싫어서 지레 방어막을 치곤 했던” 작가님이 어느 남편분과 함께 이불 홑청을 갈며 어린 시절 추억을 얘기하다가 문득 아기가 갖고 싶어졌다는 장면입니다. 저에게 이대로 유지하고 싶은 일상의 평화가 있듯, 누군가는 평범하게 행복한 일상의 순간을 쌓아가며 아이 있는 삶으로 향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직관적으로 와닿았거든요. 그렇게 태어난 작가님의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고, 저는 여전히 <어쿠스틱 라이프>를 보며 아이 있는 삶의 다채로운 결을 간접경험하곤 합니다.

그러니 익명이 님이 ‘확고한 딩크’가 아니라는 점을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삶의 중심에 나를 두고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지켜보다 보면 방향을 정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 조심스럽지만, 아이를 키우기 위해 무언가를 ‘끝없이’ 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조금 덜어내셔도 좋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대책 없이 일단 낳고 나면 어떻게든 키워진다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신다는 것 자체가 책임감 있음을 의미하지만, 어떤 부모도 아이에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가장 좋은 형태로 제공할 수는 없으니 너무 높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이에요.

사실 무자녀 여성의 삶은 각기 달라도 고민은 서로 많이 닮았기에 오늘의 편지를 쓰면서 제가 비슷한 얘기를 너무 여러 번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어요. 그러나 그동안 만난 무자녀 여성들의 “주위에 저 같은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저에게 필요했던 건 저랑 같은 선택을 한 다른 사람의 존재였던 것 같아요.”라는 말을 떠올리며, 주변에 공감하는 이가 없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익명이 님의 말씀을 보며 이 이야기를 몇 번이라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같은 선택을 한 여자가 여기에 한 명 더 있으니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구요.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저의 수영강습 소식을 반가워해 주신 K장녀 님, 감사합니다. 서른이 한참 넘어 처음 수영 ‘초’초보반에 들어가 물에 뜨는 법을 배운 뒤에는 여행을 가도 수영장 있는 숙소를 찾고, 그곳에서 홀로 나아갈 수 있는 만큼 허우적거릴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자유임을 알게 되셨다는 이야기가 참 좋았습니다. 저는 요즘 자유형 호흡을 배우며 계속 물을 먹다가 어제는 배영 발차기를 시작했는데 천장을 보며 움직이다 보니 멀미가 너무 나더라고요. 그러나 언젠가는 저도 여행지의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허우적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