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신다면 펄쩍 뛰시겠지만 (요즘 엄마보다 무서운 분은 ‘저속노화’ 정희원 선생님 같긴 한데) 저는 아침을 먹지 않습니다. 아침에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배우자와 같이 먹고, 점심은 각자 알아서 챙겨 먹는데, 마음만은 고독한 미식가인 이 시간을 위해 필요한 건 좋은 ‘밥친구’입니다. ‘밥친구’는 밥 같이 먹는 친구가 아니라 밥 먹을 때 보는 영상(콘텐츠)을 뜻해요.

금욕상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하루 14시간 정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않았던 저는 당연히 밥 먹을 때도 폰을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집에서 혼자 일하는 사람 친구로부터 ‘밥친구’라는 말을 배운 뒤부터는 조금 신중히 친구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식욕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 적당히 즐겁게 / 별 생각없이 / 느슨한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영상은 생각보다 찾기 어렵더군요.

새로 시작한 의학 드라마? 시작부터 유혈이 낭자해서 탈락.

충격적인 사건을 파헤치는 범죄 다큐멘터리? 기분과 입맛이 동반 하강.

흥미로운 설정을 가진 시리즈? 낯선 세계관을 소화할 기력이 없어서 패스.

재능 넘치는 사람들의 스탠드업 코미디? 고맥락 토크에 집중하기 어려움.

(그러나 화제의 <흑백요리사>와 <나는 솔로> 22기는 다 봤습니다.)

사람들이 넷플릭스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은 홈 화면이라고 하죠. 저도 무수한 쇼와 드라마 썸네일의 숲을 헤매다가 간신히 취향에 맞는 몇몇 작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저의 온라인 사람 친구들인 여러분에게 밥친구들을 소개하려고 해요. 

<버진 리버> (넷플릭스)

<어느 날 월터 형제들과 살게 됐다>와 <스위트 매그놀리아>에 이어 <체셔피크 쇼어>를 보다 말고(이 작품은 남자 주인공이 너무 매력 없더군요) 도달하게 된 작품인데, 저는 이런 드라마를 ‘작은 마을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풍광이 아름답고 이웃 간의 정이 돈독한 미국 소도시를 배경으로 그곳 주민들의 일과 사랑, 가족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르인데요. 주인공은 당연히 백인 이성애자 남녀이고, 로맨스 소설이 원작인 경우가 많아 그야말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밥친구를 고르면서 깨달은 것은, 다양성과 진보의 가치를 믿는 제가 생각보다 보수적인 취향으로 구성된 세계에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었어요.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사회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과 마주하면 지금 발 디딘 현실을 떠올리며 분노, 후회, 자책, 환멸 같은 감정에 빠져들기 때문에 밥 먹을 때만이라도 판타지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적당히 평온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해 고른 <버진 리버>에 저는 한동안 푹 빠져있었는데요. 대도시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주인공 ‘멜’이 개인적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사가 한 명뿐인 외딴 마을 ‘버진 리버’에 일자리를 구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고집불통 의사 버넌, 마을의 모든 대소사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시장 호프, 바를 운영하는 퇴역군인 잭 등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게 되죠. 벌써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멜은 잭과 사랑에 빠지고, 멜과 일하기를 거부하던 버넌은 결국 그의 능력을 인정해 좋은 동료가 됩니다. 얼굴만 맞대면 말다툼하던 버넌과 호프는 사실......(보실 분들을 위해 이만 생략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버진 리버>에는 소위 ‘막장 드라마’적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출생에 얽힌 비밀은 물론 살인, 마약 같은 범죄, 갑작스런 죽음과 삼각관계가 끊임없이 이어지거든요. 또 사람들이 어찌나 ‘금사빠’인지, 어제 A랑 헤어지더니 오늘은 B랑 사랑에 빠집니다. 게다가 시즌이 이어질 때마다 개연성 떨어지는 사건이나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와 헛웃음이 터지기도 하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캐릭터 각자의 빛과 어둠이 잘 뒤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유산과 난임을 경험한 여성의 상실감, 참전 군인의 PTSD, 자기 손으로 소중한 관계를 망쳐버렸던 사람의 후회,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에 맞서는 과정 등이 그 인물의 삶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는 동안 인물에 대한 저의 시선도 계속 바뀌었거든요. 처음에는 호감 가지 않던 캐릭터라도 드라마가 진행되다 보면 그가 왜 그런 내적 규범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제 버진 리버에 정체 모를 다국적 기업이 외계인 연구소를 짓는 날이 오더라도 마을을 떠날 수 없는 명예 주민이 되어 시즌 6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경일상>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 등)

요즘은 바빠서 못 읽고 있지만 저는 한때 언정소설(중국 로맨스 소설)의 애독자였습니다. 제가 느낀 언정소설의 매력은 로맨스보다도, 여성의 활동이 제한된 고대사회를 배경으로 여성의 성장과 성공서사를 다채롭게 그려내는 장르라는 점이었어요. (근데 인제 거기에 남편과 아이를 곁들인.) 복수나 경영, 정치, 전쟁 등 큰 판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주인공도 있지만, 대단한 욕심 없이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게 꿈인 주인공도 있습니다. <경경일상>의 주인공 ‘이미’는 후자였는데, 어쩌다 보니 국가 간 화친을 위한 정략결혼의 후보로 뽑혀 병약하기로 소문난 6소주(‘왕자’와 비슷한 개념) 윤쟁과 혼인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이 낮은 이미가 측비에 머물러 있는 사이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한 윤쟁은 신분이 높은 여성을 정비로 맞이합니다.

그럼 이제 궁중 암투가 시작될까요? 미녀만 보면 일단 집에 데려오는 버릇을 가진 3소주의 ‘절기 아가씨들’은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하겠죠? 남편의 지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소주 부인들의 기 싸움은 또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경경일상>은 자매애와 여성연대를 바탕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평등을 이루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점점 성장하는 과정에서 윤쟁 또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여성의 삶에 관해 배우게 됩니다. 각 소주의 부인(들)이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적 남편에 맞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나가는 모습도 무척 흥미로워요. 가상의 고대 국가가 배경이지만 성별에 따른 외모 꾸밈의 이중잣대, 산후우울증, 여성의 사회 활동에 대한 차별 등 현대 여성들이 경험하는 억압과 불평등을 잘 녹여냈다는 면에서 저는 ‘페미니즘 당의정’ 같은 드라마라고 느꼈답니다. 미술도 아름다운 데다 코미디의 각본, 연출, 연기 삼박자가 아주 잘 맞는 덕분에 재미있었던 건 물론이구요.

무엇보다 밥친구로서 <경경일상>의 최대 장점은 먹는 것을 좋아하고 요리에도 조예가 깊은 이미 덕분에 맛있는 음식이 자주 등장해 식욕을 돋운다는 점입니다. 불과 며칠 만에 40부작을 다 보고 나니 베프를 떠나보낸 기분이라 너무 아쉽습니다. 이런 드라마 또 없는지......

그나저나, 밥친구들과 노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던 걸까요. 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 저의 논문 예비심사가 10월로 다가왔습니다. 요즘 저는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이번 학기에 논문을 마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되는 데까지는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비심사가 끝날 때까지 ‘없는생활’을 잠시 쉬어갈 예정입니다. 일정이 아직 나오지 않아 언제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10월 중순 이후 어느 금요일에 다시 편지를 보내도록 할게요. 잊고 계시다가 문득 반갑게 여겨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습니다. 요즘은 수영장에 가면 추워서 덜덜 떠느라 물에 들어가기 싫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추위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머리끝까지 물에 담그고 헤엄쳐 앞으로 나가는 것이더군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