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제가 예심 원고 마감에 성공한 것이겠지요. 라는 편지를 쓰는 게 저의 10월 초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논문이 써지지는 않더군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저는 이번 학기에 휴학하기로 했습니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찬찬히 써보려고요. 그런데 막상 휴학을 결정하자 예상하지 못했던 일과 미루어두었던 일이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연말이 코 앞입니다. ‘내일은 뭐라도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올해도 330일이나 살았다니…….

‘없는생활’을 쉬는 동안 세상에도 많은 일이 있었더군요. 가장 기뻤던 일은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이었고, 가장 심란했던 일은 하나만 꼽기 어렵지만 미국 대선 결과가 새삼 괴롭더라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부모님 댁 김장이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습니다. 예전에는 꼭 제가 도와드릴 필요가 없었는데, 나이가 드시면서는 두 분 다 부쩍 힘에 부쳐 하시다 보니 지난 몇 년 동안은 김장 날마다 가서 김치 속을 넣고 왔거든요. 작년에는 기말과제 때문에 가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기에 이번에는 꼭 돕겠다고 호언장담했지요. 물론 그 얘기와 함께 휴학 소식을 슬쩍 비벼 넣긴 했습니다만.

아파트 거실에서 김장을 한다는 것은 정말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소파와 TV장, 어째선지 거실에 떡 버티고 있는 김치냉장고 두 대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신문지를 잔뜩 펴놓고 수많은 ‘다라이’와 커다란 채반, 고춧가루, 새우젓, 멸치액젓, 생새우, 소금, 풀, 절임 배추, 무, 쪽파, 갓, 다진 마늘, 청각, 도마, 칼, 믹서, 고무장갑이 널린 틈을 까치발로 지나다니기란 흡사 묘기에 가깝습니다. 불편한 자세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배춧잎 사이사이 속을 넣다 보면 허리고 고관절이고 안 아픈 데가 없죠. 그러나 저희 엄마가 말만 들어도 펄쩍 뛰시는 3대 죄악이 택시 타기, 라면 먹기, 김치 사 먹기이기에 올해도 김치 30kg을 담게 된 것입니다.

육체노동은 그렇다 치고,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한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와의 대화입니다. 가족 여행 얘기에도 썼지만, 저희 아버지는 자기 할 말만 하시면서 남을 열 받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분으로 그 대상은 주로 가족입니다. 특히 저는 아버지에게 아직도 세상 물정 몰라서 먹고 살 일이 걱정되는 자식이기에 ‘말발’이 안 서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훈계를 듣기도 하고, 아버지 기준 ‘좌파들’에 대한 비난 대상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정치 얘기를 하다가 크게 싸운 뒤로는 그런 대화를 거의 하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에 갑옷을 둘러놔야 공격이 들어와도 상처가 덜하니까요.

몇 년 전부터 부모님 댁 거실 TV에는 거의 항상 유튜브 영상이 틀어져 있습니다. 주로 한국 음식이나 문화에 우호적인 관심을 보이는 외국인,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의 일상, 해외 대규모 농장의 작물 재배, 방위 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수출입 뉴스 등을 전하는 채널이에요. 마지막 한 분야를 제외하면 비교적 정치 얘기로 흐를 가능성이 낮지만, 알고리즘의 신이 저를 엿 먹이려고 갑자기 ‘대통령’, ‘탄핵’, ‘당 대표’ 같은 키워드의 영상을 띄울 위험도 있기에 저는 계속 영상의 흐름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한 캐나다 여성이 친구에게 한국인들이 언제 어떻게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했는지 설명하는 영상이 끝난 뒤 리모컨을 들고 어떤 영상으로 넘어갈지 고민하는 아버지를 향해 준비한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저번에 보시던 그 낚시하는 채널 재밌던데.”

그 채널을 알게 된 건 지난 추석 부모님 댁에 갔을 때였습니다. 일정상 언니네가 함께 하지 못하는 바람에 조카들에게 향하던 아버지의 관심이 저와 남편을 향한 공격으로 집중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 날 저를 구한 것은 유튜브의 한 낚시 채널이었습니다. 한 30대 남성이 혼자, 혹은 동네 친구들과 여기저기로 낚시 다니며 음식을 해 먹는 내용인데 미디어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구성진 호남 방언을 들을 수 있어 좋더라고요. 남성 멤버로만 구성된 예능 프로그램에서 종종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서열을 만드는 것과 달리, 격의 없으면서도 서로 다정하게 대하는 친구들의 관계도 보기 편안했어요. 야외활동을 좋아하지도 않는 아버지가 괜찮은 낚시 채널을 발견하시다니 얼마나 다행이던지. 

아버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때마다 가장 찔리는 점은, 사실 제가 아버지와 여러모로 비슷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제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중요한 기질은 오타쿠라는 점인데요,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타인이 관심을 보이면 신나서 이것저것 들고 와 떠먹여 주는 것이 오타쿠의 특징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제 카드는 아주 주효했습니다. 아버지는 반색하시며 바로 그 채널을 틀어주셨어요. 남자가 장어도 잡고 블루길도 잡으며 활기차게 떠드는 모습을 한참 보던 아버지는 그리운 것을 떠올리듯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저 녀석은 나 어릴 때 고향 친구들이랑 똑같은 말투를 써.”

아버지는 전북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는 도시인 전주로 나와 사셨습니다. 고향에서 지낸 기간은 인생 초반의 십수 년에 불과하고, 아버지가 떠올리는 친구들의 말투는 1950년대의 기억인 거죠. 아버지는 또 그 남자가 낚시하러 간 어느 바닷가 영상을 보시며 저기는 대학생 때 가본 옆 마을 같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는 “무지하게 가난했던” 우리나라도 조금 먹고살 만해져서, 아들 친구가 놀러 오자 닭을 잡아줄 정도였다고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사진으로만 본 대학 시절, 그 먼 옛날얘기를 들으며 저는 계속 김치 속을 넣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원한다는 건 어쩌면 그리 거창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떠올려주고 내가 기억하는 몇몇 순간-그게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에 대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면 충분한 것 같아요. 그게 꼭 부모와 자식, 부부라는 관계일 필요는 없겠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김장을 마친 저에게 엄마가 고마움과 미안함을 한가득 담아 들려준 공치사는 이랬습니다. “내가 널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 저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첫눈은 반가웠는데 폭설이 되니 걱정이네요.

눈 피해나 사고 없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