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날이었다. 라는 뻔한 문장은 그 평범한 일상을 갑자기 박탈당한 순간부터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저는 여느 때처럼 노트북의 빈 화면 앞에서 몸부림치다 거실로 잠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 뉴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있더군요.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미 아시겠지요. 계엄이 선포되고 국회에서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 극적으로 가결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 35분이었다고 합니다. 지난 열흘 동안 종종 생각했습니다. 왜 나는 그때 국회 앞으로 가지 못했을까. 한밤중에 집에서 쉬다가, 친구들과 송년회를 하다가 뉴스를 보자마자 경찰과 총 든 군인들이 있는 여의도로 달려온 시민들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의사당 주변을 지킨 시민들은 어떤 마음으로 두려움과 추위를 견딜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저의 오늘은 그날 밤 의사당 안팎과 각자의 자리에서 행동한 분들에게 빚진 것이겠지요.

단지 그런 부채감 때문만은 아니지만,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본회의 표결이 진행된 12월 7일에는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집회 장소까지 가는 길은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제 앞에 있는 여성의 가방에는 인기 웹 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일러스트 카드가 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나는 저속노화 윤은 고속탄핵”이라고 적힌 슬로건을 든 여성이 있었습니다. 오는 길에 급하게 산 듯 가격표도 떼지 않은 방석을 손에손에 든 가족, 다채로운 디자인의 아이돌 응원봉과 마법소녀봉을 든 무리가 곳곳에 보이더군요. 아쉽게도 제가 아이돌을 마지막으로 좋아한 때는 막대풍선 시절이라 등산용 랜턴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지만요.

간신히 자리 잡은 곳은 국회 지붕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무대 위 발언도, 음악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주위는 온통 깃발이었습니다. 수많은 노조, 농민회, 정당 지역위원회 깃발과 함께 나부낀 이름들을 떠오르는 대로 불러보자면

스타워즈 저항군 한국지부, 나안아 패밀리, 원고하다 뛰쳐나온 로판작가모임, 행동하는 펑크, 전국 과체중 고양이 연합, 펜홀더는 클래식이야, 전국혈당스파이크방지협회, 집요정권리운동본부한국지부, 동식물쓰다듬기 연구회, 전국시민밤샘위원회, 그냥 대학생, 트윈테일 결사단, 한국재즈팬연합, 레니게이드 워 히어로연맹, 미국너구리연합한국지부, 나는 버섯...

현장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사실 저는 ‘(내향인)’ 깃발 아래 서고 싶었습니다. (내향인끼리 모이면 깃발은 누가 드냐는 문제가 있긴 한데요) 물론 ‘전국 집에누워있기 연합’,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도 제 마음 속 동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듯, 저는 사람 많은 장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추운 것도, 시끄러운 것도, 길이 막히는 것도, 화장실을 찾아 줄 서는 것도 싫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일 때문에 몸을 일으켜 뭐라도 하러 나올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깃발을 보는 것입니다. 그 각양각색의 깃발은 거리에 있는 이 많은 낯선 사람이 서로 아주 다르면서도 ‘우리’로서 함께한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거든요.

그럼에도 집회 다음 날은 삭신이 다 쑤셨습니다. 탄핵소추안이 부결되었으니 일주일 뒤 다시 표결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번엔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십만 명이 모이는 자리에 나 하나쯤 없다고 표가 나지는 않을 텐데, 이제는 정말로 미뤄둔 일들의 마감이 다가오는데, 꼭 현장에 가지 않아도 후원으로 연대할 수 있는ㄷ...... 그러나 어제, 12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은 열한 시간째 침대에 누워있던 저를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더군요. 이렇게 나온다면 아무리 (내향인)이라도 괄호를 벗어던지고 나갈 수밖에요.

때마침 탄핵소추안이 다시 표결에 부쳐지는 12월 14일 오후 집회에서 가수 이랑 님의 공연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랑 님의 대표곡 중 하나인 ‘늑대가 나타났다’는 2022년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서 공연하기로 확정되었다가, 윤석열 대통령의 행사 참석이 논의되면서 일방적으로 제외된 노래입니다. 다른 노래로 바꿔 불러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랑 님과 기념식 총연출을 맡은 강상우 감독도 교체되었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를 들어보셨다면, 혹은 아래 가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늑대’는 폭군이나 독재자를 겨냥하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지레 피하고 싶어했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빚어진 이 노래는 무척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듣기 위해 돌아오는 토요일, 여의도 국회 앞으로 갑니다. 낯선 많은 사람과 함께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늑대가 나타났다

작사·작곡 이랑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마녀가 나타났다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린다

폭도가 나타났다

배고픈 사람들은 들판의 콩을

주워 다 먹어 치우고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늑대가 나타났다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단이 나타났다

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걸렸고 문밖에는 사람이

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걸렸고 문밖에는 사람이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

마녀가 나타났다

폭도가 나타났다

이단이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