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는 조금 깁니다. 추신이 있으니 펼쳐서 끝까지 읽어주세요.)

아빠가 카톡으로 제게 한글 파일 하나를 보내신 건 작년 겨울이었습니다. “전주 고모가 그동안 살아오신 얘기를 글로 쓰셨다니 한번 읽어봐라.” 전주 고모는 아빠의 큰누나입니다. 팔 남매의 장남이자 셋째인 아빠에게는 누나가 두 분 계셨는데 둘째인 둔촌동 고모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빠보다 여섯 살 많은 전주 고모는 1942년생, 올해 80세이십니다.

고모에 관해 제가 아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보수적인 고모부와 결혼해 빠듯한 살림으로 육 남매를 낳아 기르느라 고생이 많으셨다는 것 정도였어요. 돌아가시기 전 10년 동안 저희 집에 사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대화에서 언뜻 들은 이야기였지요. “나이 많은 사람헌티 시집보내믄 아껴줄 줄 알았는디 그도 안허드라구…….” 게다가 저에겐 오래전 서운한 기억도 있었습니다. 저와 언니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집에 오셨던 고모가 엄마를 향해 “기집애들 그렇게 공부시켜 뭐 하냐”며 우리 학원 보내는 것보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더 신경 써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일단 파일을 열고 나자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세 살이 되었을 때 해방을 맞이하고 아홉 살에 6.25 전쟁으로 서울에서 전북 부안까지 걸어서 피난을 갔다가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을 통과하며 오늘까지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고 생동감 넘쳤거든요. 수많은 풀과 나무의 이름과 쓰임, 낯선 옛말과 풍습, 시대상을 비추는 일화들을 읽으며 저는 고모에 관해서도 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물세 살의 고모에겐 서울 노라노 양재학원에 다니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가위와 자도 다 사두었는데, 집에 한 번 다녀가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전주에 들렀다 선을 보고 한 달 뒤 결혼하게 되신 거죠. (저는 이 대목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살짝 원망했습니다) 만약 고모가 계속 양재를 배우셨다면 어땠을지 궁금했지만, 고모는 예정에 없던 삶에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물자가 부족하고 사회가 불안정했던, 그 만만치 않았던 세월을 돌아보는 고모의 덤덤한 위트에 저는 종종 웃음을 터뜨렸어요. 너무한 ‘유교맨’이라 여겼던 고모부가 의외로 딸들에게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할머니가 ‘우리 엄마’라고 불리는 대목에서 눈물이 핑 돌기도 했어요. 고모의 글에는 제가 몰랐던 고모뿐 아니라 젊은 시절의 아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라져가는 한 세대의 기억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난주, 아빠는 저에게 다시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고모의 책이 나왔으니 두 권 사서 한 권은 집으로 보내달라고요. 읽은 다음 고모에게 전화 드리라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전화, 그것도 웃어른에게 해야 하는 전화를 지독히 어려워하는 저지만 이번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저는 고모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고, 고모라는 사람도 좀 더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우리 작가 조카가 전화를 다 주었네?” 고모는 특유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저희는 이 한 번의 통화로 평생 나눈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고모는 여든에 첫 책을 낸 소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면서 겪은 것이 있듯이 사람마다 만고풍상이 있잖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하는 것인디 나는 인제 그것을 혔으니 속이 다 시원허드라.”

제가 좋아하는 고모의 글 한 편을 소개하며 오늘의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참, 고모의 책 제목은 『보통 아닌, 보통의 나날들』 (글·그림 최기효) 입니다. 광고는 아닙니다. 제가 이런 편지를 쓰고 있다는 건 남편을 제외한 가족 모두에게 비밀이거든요.

안녕히 계세요.

어떤 집의 애사

남편이 부여군 임천면 직장에 다닐 때다.

어느 날 초저녁 아이들을 재우기 전, 옛날얘기 들려주며 남편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옆 담 사이 집에서 와그르르 우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나가 보니, 옆집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팔 남매를 두신 분으로 빨래터에서 더러 만났던 분이다.

안집 아주머니에게 가서 말하고 함께 가 보자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방문을 닫는다. ‘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박 면장 댁으로 가니 그곳에서도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 그냥 나만 혼자 가 보자’ 하고 처음 가는 집의 넓은 마당을 지나 부엌에 가니, 아는 아주머니 혼자 가마솥에 밥하느라 불 때다가 나를 보고 반긴다. 동네가 제법 큰, 조합장 댁인데 사람이 아무도 오지를 않는다. 밥이 넘치니 솥뚜껑을 좀 열었다 닫으라고 해 그렇게 하고, 다 된 밥을 그릇에 퍼서 사잣밥으로 사립문 옆쪽에다 놓아주라기에 그렇게 하고는 돌아왔다.

얼마 뒤 셋째 아이를 포대기로 둘러업고 가는데, 장터 마을 쪽 길에서 노신사가 달려오듯 내 앞에 와서 극진히 90도로 절을 한다. 누가 볼까 얼른 피해 집 쪽으로 왔다. 옆집 조합장이었다. 그날 와 준 것이 고마웠던가 감사 인사를 하신 것인데, 나는 젊을 때였고 다른 사람 눈에 띌까 두려워 도망치듯 돌아오고 말았다.

나중에 들으니 그 아주머니가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가신 것이고, 돌아가시면 병균이 전염된다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물색 모르는 새댁이, 아이 셋 키우는 젊은 어미만, 모르는 집 애사에 겁 없이 혼자 간 것이었다.

뒤에 젊은 여자가 들어와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보았다.

* 추신

추석 연휴가 2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명절은 즐거운 휴일이지만, 무자녀 부부에게는 “느이들 피임하니?” “나도 손주 얼굴 좀 보고 싶다!” “언제까지 철없이 그러고 살래?” 등 사방에서 압박 및 질문을 가장한 공격이 집중되는 날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온갖 무례와 오지랖에 대처한 여러분의 비법을 나누고 싶으시다면 9월 7일 수요일까지 여기(링크)에 간단한 사연을 적어주세요. 추석 전날 발행할 ‘없는 생활’에서 소개하려 합니다. (사실, 제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