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는 다른 날보다 많이 깁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명절을 맞아 출산에 관한 무례와 오지랖을 경험하신 분들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저의 이야기는 사연이 끝난 뒤 살짝 덧붙이도록 할게요.

[저희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갖겠지만 아이 없이 살수도 있다, 서로 인연을 만난 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혼 후 첫 명절이었던 추석에 시가에 갔더니 딱 하나 있던 방석을 서둘러 저에게 주시더라고요. 여자는 찬 곳에 앉으면 안 된다고, 항상 따뜻한 곳에 앉아야 아이가 생긴다고. 제가 잠시 어디에만 다녀와도 다시 방석을 챙겨주시고 심지어 다른 친척이 방석에 앉아있으면 그 방석을 달라고 해서 저를 주셨습니다. (그 친척은 저보다 먼저 결혼한 여자이고 아이는 없었습니다) “너희 피임하니?”라는 말은 너무 불시에 물었구요. 반찬을 싸 주실 때는 아이에게도 무해하고 안전한 통이니 나중에 다시 써먹을 수 있다고 강조하시더군요.

다음날인 추석, 예배를 드리고 나서 시어머니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시더군요. 저를 위해 기도하실 때는 친척들이 둘러앉아 있는 상황에서 저의 “태를 열어달라”고 하셨습니다. 당황스럽고 기분 나쁘고 표현도 원시적이고 무례하다고 느꼈지만, 기도 중이라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말이라도 할 텐데 그때는 첫 명절이라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어요.

명절이 지나고 남편이 전화로 아이 얘기하지 마시라, 무례한 거다, 장모님은 절대 그런 말씀 안 하신다고 말씀드렸지만 듣지 않으셨습니다. “나이를 생각해라” “피임하는 거 아니지?”라는 말을 반복하시더군요. 남편은 그냥 흘려들어라. 옛날 사람이라 못 고친다. 다음에 또 그러면 말해주겠다 하지만, 흘려들으라는 것도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말 같아 안 하려고 합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는 출근길에 제가 화가 나 있고 일주일 전에는 심하게 체합니다. 지금은 명절에만 만나고 있는데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안 보고 살았을 텐데요. by 건강한 사회]

[시어머님이 아이를 언제 가질 건지, 시험관은 안 할 건지 물어보시길래 ‘저는 자궁검사를 전부 다 해봤고 건강하게 나왔다. 하지만 남편의 정자가 500마리 중에 한 마리만 정상일 정도로 건강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례한 사람에겐 솔직하게 이야기해줍니다. 또는 무례한 사람에겐 “너도 언젠가 죽겠지”라고 생각합니다. by 홍]

[어느 설날이었는지 추석이었는지 시어머니께서 “애는 지 먹을 거 가지고 태어난다. 빨리 그냥 낳으면 그냥 큰다” 하셔서 제가 맞벌이 안 하고 외벌이로 살 수 있으면 낳겠다고 했더니 신랑 눈 튀어나오는 줄 ㅋㅋㅋㅋㅋ맞벌이 필수라며ㅋㅋㅋㅋㅋ by 이제는 시부모님 없는 36살 전생에 나라 구한 년]

[저희는 아이 없이 살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닥칠 후폭풍이 두려워 우선 자연임신(?)으로만 출산할 계획이라고 해둔 상태에요. 그런데 온 가족이 모인 명절에 시어머님이 20명분 설거지를 혼자 하는 제 뒤에서 과일을 드시며 ‘우리 아이(저)는 몸이 차고 어쩌고 몸은 좋아 보여도 알맹이가 없는 것 같다’라며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손발이 찬 편이라 겨울에 손발이 시리다는 말을 괜히 했던 걸까요?

명절이 끝나니 몸에 좋다는 한약, 음식, 약 등이 택배로 도착했어요. 챙겨주시는 시댁 친척분들 마음은 감사했지만 먹기 싫어서 처분하는 것도 고역이었습니다. 거절은 당연히 못 했어요. 어머님이 통보하다시피 ‘누구누구가 택배 보냈다고 하니 받고 전화 한 통 드려라’ 하셨기 때문이죠. 몇 년간 죽어간 많은 동물과 약초들, 썩지도 않고 남아 있을 비닐 쓰레기 등등이 떠올라 더 괴롭네요. 그나마 병원에는 안 끌려가서 다행인가 싶기도 해요. 시험관이 가능한지, 제 몸 상태는 어떤지 상담 예약을 잡았으니 언제 어디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옆에 있던 남편이 그제야 그건 아닌 거 같다고 한마디 하더라고요. 남편은 제가 어머님과 ‘대를 잇는 중대사’ 때문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의) 통화를 해왔는지 몰랐더라고요. 알았어도 결혼하고 효자가 된 남편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지만요.

결혼 8년 정도 지나니 명절 후 도착하는 약들은 줄었지만, 아직 저희 냉동실에는 약재 포들이 잔뜩 있답니다. 한 번에 버리면 들켜서 다시 집으로 배달오기 때문에 적당히 때를 보며 처분해야 합니다. 받아치고 싶은 말들을 항상 상상하지만, 후폭풍 때문에 하지 못해 답답합니다. by 언젠가 생기겠죠 봇]

[사실 저는 아이 얘기가 나오면 아무 말 못 하고 집에 와서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남편은 다르더라고요. 상사가 “그래도 아이 한 명은 있어야지!” 하길래 “그럼 돈 주세요!” 했더니 아무 말 못 하셨대요. ㅋㅋㅋ 그전까지 여자들만 오지랖이 넓은 줄 알았던 저는 의외로 남자들도 오지랖이 심하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by 나비]

[시댁 친척 누군가가 시골에서 펜션을 운영한다고 해서 가족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결혼 2년밖에 되지 않아 저희는 출산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펜션 주인이라는 친척은 초면인 저를 보자마자 “너네는 방을 따로 잡아줄 테니 오늘 밤 애기를 만들어라”라고 했습니다…………시댁 식구들은 그 말이 너무나 웃긴다는 듯이 모두 까르르 웃었지요. 그 천박한 발언과 시댁 식구들 반응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저는 얼굴이 완전히 굳었지만 아무도 저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아, 결혼하면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 결혼했으니 당연히 애는 낳는 것이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농담을 해도 좋을 만큼 당연하다는 그들의 기이한 상식(?)에 놀라고 말았고, 이건 성희롱이야, 저 새끼는 미친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했지만 ‘새색시’가 시댁 식구의 ‘가벼운’ 농담에 정색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내 안의 유교걸이 분노보다 먼저 튀어나왔다는 데에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몸이 안 좋다며 단 1분도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짐이 가득한 방에 혼자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다 수시로 몸은 괜찮냐며 확인하러 들어오는 식구들을 피해(이제 그만 나오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공간에 함께 있고 싶지도 않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싶지도 않아서 읍내로 나가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내던져진 것 같은, 정말 처참한 기분이었어요. by H]

[“요새 섹스는 며칠에 한 번씩 하세요?”라고 받아칩니다.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주로 친정 방문할 때마다 엄마가 한 번씩 아이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애가 있어야 노후에 외롭지 않다” “지금 조카들 이뻐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애를 키워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 등등…. 그럴 때마다 저는 다양한 버전으로 대답을 해왔습니다. “독거 노인들이 자식이 없어서 혼자 사는 줄 알아?” “애 낳으면 누가 키워? 나 회사 그만두면 외벌이로 세 식구가 어떻게 살아?” “애 낳았다고 다 성숙해지는 거 아니던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못마땅해하시는 표정만 짓고 계셨어요.

결혼을 전후해서 최근 몇 년간 저의 일관된 메시지는 “앞으로 이 세상은 아이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키우기 어려울 것”이었습니다. 전염병, 미세 먼지,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점점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일자리 부족, 한국 특유의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문화 등 평소 제가 힘들게 느꼈던 부분들을 자식한테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동식물에 관심이 많은데 지금 인간종은 충분히 많이 번식해서 지구를 병들게 하는 단계에까지 왔으니 굳이 나까지 동참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느냐는 식으로 반응하시던 엄마도 이제는 “그렇지…” 하시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ㅎㅎ by 여니]

[결혼하고 처음 시할머니께서 집에 방문하셨을 때 TV에서 육아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할머니께서 “피임하면 안 된다-” 하셔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 경치 좋은 카페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갔더니 시아버지는 어느새 쓱 나가시고, 어머니는 “요즘 배운 애들은 다 이렇게 이기적이니. 남들 다 낳고 사는데 노후에 어쩌려고 하느냐. 대체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가 뭔지 말해 보라”고 하셨죠. 그해 특히나 극심했던 미세 먼지, 기후 위기, 혐오와 경쟁이 가득한 한국 사회, 남편의 잦은 출장과 혹독한 업무량으로 인한 저의 독박육아 확정 등 고민하는 이유를 말해 보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어이없어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주제로는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저 저희가 결정할 수 있도록 지켜봐 달라고 이야기했어요.

아직 아이 없는 생활을 확정 짓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저런 오지랖들로 저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느껴질 땐 “마이 바디, 마이 쵸이스!”를 되새깁니다. 오직 나만이 나의 임신을 결정할 수 있어요. 이번 명절은 모두가 무신경한 말에 마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이 없는 삶을 원하거나 유지 중인 여성들과 대화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한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명절에 펼쳐지는 출산 관련 오지랖과 그에 대한 대처법을 듣고 싶었던 것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가족들과 만나는 분들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어서였어요. 하지만 사연이 하나씩 도착할 때마다, 이 문제는 각자 처한 상황마다 헤쳐나갈 방법이나 개선 가능성이 너무나 달라서 풀기가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즐겁지 않은 기억인데도 떠올려 이야기 들려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함께 차라도 마시면서 화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가 술을 전혀 못 하거든요….) 주변인이나 내 부모가 아이를 낳으라 간섭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한국의 명절은 가부장제의 폐해가 총출동하는 날이다 보니 시가 이야기가 훨씬 많았습니다. 여기에 담긴 분노, 모멸감, 자괴감, 억울함 등 복잡한 감정들은 H 님의 “아, 결혼하면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이 결혼으로 인해 ‘며느리’라는 위치로 격하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죠. 저도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많은 경우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나 의지와 별개로 시가에 귀속된 ‘몸’처럼 취급된다. 출산은 그 ‘몸’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기에, 시부모가 아들 부부의 성생활까지 간섭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이 챕터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혼이 강화도 조약이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분명하다. 누구보다 나의 아군이어야 할 배우자가 자기 쪽으로 쳐들어오는 외세를 단단히 막아내는 것이다.”

뻔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 대원칙이야말로 단지 출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결혼 후 발생하는 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나로 인해 내 가족과 엮이게 된 배우자가 어떤 수단이나 용도가 아닌 그 사람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보호하는 것은 인생의 파트너로서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일 테니까요. (지구상의 남편 여러분, 보고 있나요?)

그럼 이만 기나긴 편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누구와 만나든 마음 상하는 일 없이,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대화가 함께 하는 추석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이 편지를 하루만 일찍 보냈다면 아차 하며 차편과 일정을 취소하고 그냥 홀가분한 명절을 보내는 분도 계시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러나 여러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연휴는 이제 시작이니까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