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불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줄임말인데요, 이건 제가 좋아했던 故 신해철 씨가 작사·작곡한 노래 ‘Lazenca, Save Us’의 가사에 쓰인 표현이에요. 저는 마감이 닥쳐올 때마다 속으로 울며 이 노래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탄식은 하늘을 가리우며 / 멸망의 공포가 지배하는 이곳 희망은 이미 날개를 접었나~♬” 그리고 요즘엔 매일 ‘스불재’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9월부터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대학 입시가 끝난 뒤에는 '공부'라 불리는 모든 영역을 아주 적극적으로 멀리했어요. 『이런 얘기 하지 말까?』에서 고백했듯 과에서 꼴찌로 졸업했고, 토익 시험 한 번 본 적이 없을 정도로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재미없고 어렵고 복잡한 것은 무엇이든 피하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얘기는 잘 몰라도 쉽고 재미있는 얘기를 쓸 수 있다면 그걸로 내 몫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저의 말과 글이 점점 앙상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기도, 감정만 앞서고 깊이가 없는 글을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요. 계속 이 자리에 멈춰 있어도 괜찮을까? 하는 고민이 한 번 떠오른 뒤에는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해서, 정신 차려 보니 제가 대학원에 원서를 넣고 등록하고 있던 것입니다.

스-스-로-불-러-온-재-앙-에-짓-눌-려-허- (구슬픈 리코더 버전)

지난 20년 동안 읽은 텍스트라곤 팬픽, BL, 범죄소설뿐인 사람이 갑자기 대학원 커리큘럼에 던져져 마르크스, 벤야민, 하버마스를 읽고 심지어 뭔가 써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3천 피스 짜리 퍼즐을 맞춰야 하는데 전체 그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데다 줍는 퍼즐마다 족족 부서져 있는 것 같은 기분?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에 뛰어들었는데 수면은 꽁꽁 얼어붙어 있고 갑자기 바닥이 디스코팡팡으로 바뀌어 여기로 퉁! 저기로 퉁! 하고 정신없이 굴려지는 것 같은 기분?

공부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끊임없이 직면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문득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어요. 모든 일이 처음이고 어렵기만 해서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보면 두려움과 막막함이 저를 압도할 것처럼 밀려오던 날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시간을 거쳐 10년 동안 회사에 다니고 5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며 이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범주를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적당한 갑옷을 둘러 나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낯선 곳에서 초보자로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하게 된 거죠.

게다가 얼마 전 수업 시간에 IMF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기들이 그때 자기는 세 살이었다거나 태어나기 전이였다고 말하는 걸 듣고 저와의 나이 차를 실감하고 말았어요. 또 하나 알게 된 건 요즘엔 많은 학생이 가벼운 노트북을 소지하거나 태블릿에 펜슬을 사용한다는 사실이에요. 저 때는 전자사전 정도가 고급 장비였는데! 지난주까지 노트를 들고 가서 필기하다가 넋이 나갈 뻔한 저는 이번 주부터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서, 그동안 만화와 넷플릭스 보는 용도였던 아이패드와 연결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이패드에 PDF 파일 내려받아 필기하고 편집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노션, 굿노트 등 배워야 할 게 끝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9월 내내 ‘내가 왜 대학원에 왔을까?’ 생각했어요. (‘자퇴할까? 휴학할까?’와 함께……)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아는 게 없는 사람이 여기 있어도 될까, 계속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대학원 같은 건 남의 일이라 여기던 시절에도 그저 재밌어서 보던 인스타그램(@dbpia_insta) 만화 ‘듀선생의 인생제반연구소’에서 명대사를 발견했어요. “모범생! 또는 오타쿠!! 또는 둘 다!! 관찰결과, 대학원에 오는 사람은 결국 이 둘 중 하나거나 둘 다입니다!!” 우등생은 아니지만 조용한 모범생 오타쿠로 살아온 저는 즉, 아주 전형적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던 거죠. (근데 인제 여기에 불혹의 나이를 곁들인)

생각해보니 저는 공부를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궁금했던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정말 달라지는 게 가능한지도 알고 싶었어요. 당장 이번 학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이 과정을 끝까지 다닐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지만, 그리고 학위를 받는다 해서 지금보다 훨씬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내가 모르는 곳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일단 가보고 싶었어요. 물론 엄청난 액수의 입장료를 내고 자학의 늪에 발을 들였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우선은 다음 주의 발제문을 열심히 써보려고 합니다. ‘잘’은 바라지도 않고요.

오늘 사진의 주인공은 한가로이 볕을 쬐는 캠퍼스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보러 모여든 학우들의 발입니다. 다들 쾌청한 가을날 즐기고 계시면 좋겠어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