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핫한’ 질환은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였던 것 같습니다. 친구나 지인이 속속 성인 ADHD 진단을 받고, ADHD에 관한 책이 쏟아져나오고, 양육자들이 아이의 ADHD 여부를 걱정하는 글을 자주 접하면서도 저는 스스로 ADHD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자주 지각한다거나 갑자기 넘어진다거나 물건을 자꾸 잃어버린다는 ADHD인들의 경험이 저와 별로 겹치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저 할 일을 미루다 ‘벼락치기’하는 건 게으른 성격 탓, 하루 12시간씩 스마트폰 보는 건 현대인의 흔한 중독, 과몰입은 오타쿠의 특성이라 여겼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나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 건 두 달쯤 전이었습니다. 논문을 쓰려다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휴학한 이후, 저는 논문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기로 하고 일정을 잡았습니다. 첫 번째 모임 전까지는 한 달가량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무려 4주 내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일회성 원고쓰기 같은 일들은 그럭저럭 해내면서도, 논문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저 막막한 기분만 들더라고요. 얼른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기력이 심해 시작하지 못하는 나날이 흐르고 자책이 우울감으로 이어지던 중 윤석열 씨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그 후에는 일상과 기분과 수면 패턴이 더욱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결국 스터디 모임을 사흘 앞두고 절박한 심정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ADHD 검사를 예약했어요. 내가 ADHD이든 아니든, 뭐가 문제인지 알고 싶었거든요.

첫 번째 상담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께서 오늘 한 검사만으로는 결론 내리기 조금 어려우니 2주 뒤에 다시 보자고 말씀하셨을 때는 내심 조금 실망했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선생님이 쓰신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에 제 마음을 그대로 읽은 듯한 문장이 있더라고요. “내가 ADHD가 아닐까 싶은 마음에 병원을 찾았으니 어서 검사를 해서 결과가 짠 하고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실은 제 바람도, 얼른 검사해서 결과가 짠 하고 나와서 약을 먹고 집중력이 팟 하고 돌아오는 거였거든요. (원래 없던 집중력이 어떻게 돌아오느냐는 차치하고라도.) 그런데 이런 일이 그렇게 단순할 리 있나요.

첫 상담 후 읽은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는 ADHD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늘 스스로 집중력이 부족해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따르면 주의력 결핍과 집중력 저하는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합니다. 집중력이 한 가지 일에 힘을 기울여 몰두하는 능력이라면, 주의력은 어떤 일이나 사람, 사물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관심을 일관된 태도로 유지하고 지속하는 능력이며 상황에 맞게 스스로를 통제하고 대응하는 능력이라고 해요. 주의력이 부족해지면 집중력 저하 현상을 겪게 되는데, 이것은 꼭 ADHD 때문만은 아니고 스트레스, 불안, 우울, 그리고 동기부여와도 관련이 있다는군요.

저에게 가장 반가웠던 대목은, ADHD인이 가장 많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전반적인 구조화가 어렵다’라는 것이었어요. 구조화...그것은 대학원에 와서 아주 많이 들은 개념인데, 저는 항상 그 구조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거든요. 구조를 읽는 것도, 구조를 만드는 것도요. 논문은 특히 구조적인 글쓰기의 대표 격인데 구조를 생각하려고만 하면 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어요. 대학원 친구들은 저더러 글 쓰는 일을 오래 했고 책도 쓴 적이 있으니 논문도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었지만, 저는 제가 어떤 벽에 가로막혀 있는지 설명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괴로웠어요.

두 번째 상담과 몇 가지 추가 검사 후 의사 선생님께서는 드디어 제가 겪는 문제를 진단해 주셨어요. 저는 경도의 주의력 결핍으로, ADHD와 아닌 사람의 경계선 정도에 있다고 합니다. 과잉행동이나 충동성이 없는 편이라 어릴 때 거의 증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그동안 생활하는 데도 큰 문제가 없던 걸로 봐서, 아마 논문을 쓰지 않았다면 ADHD인지 계속 모르고 지냈을 수도 있다고요. 이럴 수가......우울과 무기력에 잠식되지 않으려 대학원으로 도망쳤더니 ADHD가 복병처럼 기다릴 줄이야.

하지만 의사 선생님에게 저의 혼란한 상태를 털어놓고 ADHD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오히려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살면서 내가 왜 어떤 것들을 이해하거나 적응하기 어려웠는지 뒤늦게 깨달으며 빠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나의 모든 결점을 ADHD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문제가 조금 선명해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ADHD인은 피로 관리와 일상 관리에 어려움을 겪기 쉬우니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고 일상 루틴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건강 문제로 한동안 쉬었던 수영도 다시 시작했어요. 소량의 약도 처방받았는데, 처음 약을 먹고 잠들었다 깨어날 때 전구가 켜지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을 느껴 깜짝 놀랐답니다. 그동안에는 아무리 오래 자도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고, 종일 머리가 멍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비록 이 약이 저를 초인으로 만들어주지 않더라도 뭔가 좀 더 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의 마지막 문장처럼요.

“실수를 해서 스텝이 꼬여도 포기하지 않으면, 그것이 탱고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오늘의 사진은 한파에 길에 버려져 슬픈 아이스 아메리카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