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왜 그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을 테고, 제가 좋아하는 장르도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하지만 20대 때의 저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주저 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데려간 친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유독 그 영화에 대해서는 전후 사정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누구와 봤는지, 심지어 그것이 어떤 이야기였는지도요. 다만 떠오르는 거라곤 젊은 남자와 어린 여자아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놀라운 풍경들, 아주 강렬한 붉고 푸른색 정도였어요. 그 영화는 기이하고 신나는 꿈속의 모험 같았고, 아라비안나이트나 어릴 때 읽은 세계의 동화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극장에서 그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정말로 그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개봉한 <더 폴: 디렉터스 컷>은 2008년 한국에서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으로 개봉했던 영화입니다. 당시 관객은 2만 8,123명이었고, 저는 운 좋게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거죠. 그 후 16년 동안 가끔 <더 폴>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할 때마다 저는 늘 설명에 실패했습니다. “무성영화 시대에 영화를 찍다 다친 남자가 병원에서 어린 여자애를 만나서 얘기를 들려주는 내용인데 화면이 진짜 아름답고 뭔가 마법에 걸린 것 같고......하여튼 꼭 봐.” 제 표현력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얼마 전 <더 폴>을 다시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시 직접 봐야만 한다고요. 가능하다면 극장에서요.

인도 출신으로 이란에서 자랐고 히말라야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는 타셈 싱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광고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우연히 본 불가리아 영화 <요호호>(YO HO HO)의 판권을 구입하는 데 15년, 전세계 28개국 로케이션을 위한 장소 섭외에 17년, 캐스팅에 7년, 촬영에 4년 등 <더 폴>의 기획부터 완성까지 총 29년이 걸렸다고 해요. 그동안 벌어둔 돈은 물론 집까지 팔아 제작비를 마련했지만, 막상 개봉 당시에는 혹평받았고, 제작비의 10분의 1도 회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 이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자 타셈 싱 감독의 내한까지 이루어진 거죠.

타셈 싱 감독의 과거 인터뷰 중 제가 특히 좋아하는 건 “광고계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자신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 거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핀처는 나를 두고 ‘그걸 현실화한 유일한 멍청이’라고 했다.” (<씨네21>) 라는 대목입니다. 무모해 보이는 프로젝트에 인생을 내던질 만큼 어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만이 아니라 일종의 광기가 필요했을 텐데, 심지어 그 사랑이 충분히 보답받지 못한 것 같을 때 그는 어떻게 느꼈을까요? 그리고 지금 사랑받는 기분은 어떨까요?

며칠 전 <더 폴>은 1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엊그제 한국에 온 타셈 싱 감독은 이 영화에 특별한 애정을 보인 한국 여성 관객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인터뷰와 <더 폴>에 관한 여러 정보를 보며 저도 덩달아 기뻐지곤 해요. 좋아하는 영화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되고,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마음껏 자랑스러워하며 이런저런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은 제 성공이 아니라도 즐겁더군요. 한편으론 제가 썼던 책들이 먼 미래의 어느 날, 기대치도 않았던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세속적인 망상도 해보고요.

그런데 실은 내게 꼭 그런 날이 오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더 폴>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환상적인 비주얼과 함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도, 영화에 관한 이야기도, 내 인생의 이야기도 각각의 생명력을 지닌 채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는 게 재미있지 않나요. 물론 월요일의 제가 금요일에 간 MRI를 찍으러 가는 전개를 맞이할 줄 몰랐다는 사실은 그리 재미있지 않지만, 다음 장면에선 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겠죠.

안녕히 계세요.

추신. 오늘의 사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밟아 본 강아지 발자국입니다.

얼마 전, 셀럽 맷 님의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333회 ‘주의력 결핍 대학원생의 기쁨과 슬픔’ 편에 출연해 ADHD, 수영 등 요즘 일상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