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길을 걷기’ 편을 읽고 문득 저의 고민이 떠올라 몇 자 적어봅니다. 저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으며 아이를 키우지 않는 여성의 삶이 막연히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 구속되지 않는 상태에 대한 열망...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경험하고 갖게 되었을 때 많은 감정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런 동시에 ‘내가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선택했더라면….’이라는 몹쓸 가정을 하게 되더군요. 아 그때 내가 결혼을, 아이를, 또 아이를…. 등등. 어째서인지 나는 이미 저질러버린 일들보다 해보지 않은 일들을 더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지 않고 자신만의 또 다른 길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하지만 저는 비단 육아와 출산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가지지 못하게 된 것들에 아쉬워하면서 그 상실감을 버티며 살아가야 했어요. 그런데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것도, 아이를 갖고 싶은 것도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차이로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더라구요. 나는 초콜렛을 좋아하는데 친구는 쓰디쓴 녹차를 좋아하는 것처럼요.

보이는 길은 안심이 되지만, 가보지 않아 보이지 않는 길은 늘 미지의 세계로 보입니다. 저는 이제 그 길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요. 오래전부터 지금의 직업을 갖기로 마음먹었던 제가 오늘 문득 의사가 됐다면 어땠을까 망상하는 것처럼요. 그렇게 저도 하루하루 아이가 없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하는 보이지 않는 길에 대한 열망을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평생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 요정]

[ ...종종 아이가 있다면 내가 이미 지나친 과거를 또 한 번 경험하고, 그 아이에게 내가 받지 못했던 보상을 돌려줄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삶을 놓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행위가 건조한 어른들의 현실 속, 판타지를 찾고자 하는 발악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고요.

제가 딩크로 살기로 했으면서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 미련을 두게 되었던 것은, 사실 본능적이라거나, 강요나 학습을 받았다거나, 그로 인해 아이가 있는 삶을 갈망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내 지난 과거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해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삶이 그다지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둘만으로 충분하기에, 때로는 낳지 않는 것이 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임을 납득했기에 딩크로 살기로 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딩크를 결심하며, 어린 시절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기분이었습니다. 굳이 내 자식에게 대신 보상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앞으로의 나에게 집중하면 된다는 걸 받아들이고선 조금은 후련해졌달까요.

- K장녀]

K장녀 님과 요정 님의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는데, 저는 어쩐지 그 점이 참 좋았습니다. 각자의 선택에 관해 오랫동안 성찰해오신 내용을 담아 주셔서, 그냥 그 자체로 여러분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어제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가 의사 선생님께 “반추를 굉장히 안 하는 편에 속한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반추(反芻)란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함. 또는 그런 일”을 뜻하는데, 반추의 빈도나 정도에 따라 우울로 이어질 수가 있다고 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지나간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편이고, 의식적으로도 그렇게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건 좋은 점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성격과도 통하다 보니 저의 한계이자 단점이기도 해요. 다만 아이를 갖지 않고 사는 사람에게는 좀 다행스러운 특성 같기도 합니다. ‘안 낳는다던 사람들이 못 낳을 나이 되면 다 후회하더라’라는 저주에 대한 방어진 같은 거랄까요.

이런 성격 때문인지, 사실 저는 ‘아이가 있다면~’이라는 상상을 별로 하지 않는 편입니다. 배우자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삶이 엄청나게 힘들 수도 있지만 또 그 이상으로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면서도, 가지 않은 길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진 않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에 관한 트윗들을 읽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집에 돈이 없을 때, 아팠을 때, 생일과 크리스마스, 혹은 그냥 아무 날도 아닌 날 부모님과 보낸 시간, 먹은 음식, 그 사람들이 최선을 다했던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내 부모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자라면서 당연히 갈등과 결핍 또한 겪었지만, 그 기억만은 남아서 여전히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지금 부모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는 거죠.

그 작은 이야기들은 그동안 제가 들은 그 어떤 출산 권유보다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는 말은, 발화자가 양육자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대부분 부모의 입장에서 다루어졌던 것 같아요. 노후라거나 책임이라거나 가족의 완성이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누군가 어느 순간 마음을 다해 키웠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 아이가 그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기억하고, 그 행복을 만들어 준 부모의 마음을 떠올리는 관계가 되는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의 내 삶에 그런 순간과 관계가 없을 거라는 점이 조금 아쉬워졌어요. 후회도 상실도 미련도 아닌, 담담하지만 약간은 허전한 감정이었죠.

그런데 부모님 이야기 사이에서 특히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어느 날 하수구에 5백 원 동전을 빠뜨려 울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듣더니 손을 뻗어 동전을 찾아주었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땐 아저씨가 하수구에서 동전을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자신에게 꺼내주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는 글쓴이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혼자 미소짓곤 합니다. 

제가 다니는 수영장에서는 1, 2월에 어린이 대상 방학 특강을 진행했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옆 레인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온 일곱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몸을 띄우는 보조도구를 고정해둔 허리벨트 버클을 빼지 못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버클 옆을 눌러야 하는데 손힘이 부족하고 요령을 잘 모르니 무작정 당기고만 있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이 먼저 샤워실로 가 버리자 초조한 얼굴로 두리번대던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리고 버클에서 일단 손을 떼게 한 다음 풀어주었어요. 아이는 저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다음 샤워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3초도 채 되지 않을 그 순간이 가끔 떠오릅니다. 아마 그 아이보다 제가 더 자주, 더 오래 기억할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편지가 조금 길다고 느껴지신다면 사실입니다. 논문 예비심사일이 다가오자 주위에서 “너 지금 발등을 넘어 무릎까지 타고 있단다”라고 경고해주어서 당분간 ‘없는 생활’을 쉬어가기로 했더니 아쉬운 마음에 계속 길어지네요. 가능하면 5월에는 한 번 돌아와 안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기나긴 하룻밤’ 편을 읽고 안부 물어주시고 마음 전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과분하게 다정한 마음을 받자니 머쓱하기도 했지만, 이런 마음들의 존재를 느낄 때 사람은 계속 살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 온기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 사람은 살아갈 힘을 잃기 쉬울 것 같고요. 그러니 환란의 시대일수록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여기저기 마구 나누도록 해요.

안녕히 계세요.

* 추신. 혹시 무자녀로 비교적 만족스럽게 생활하다가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중반쯤 ‘유전자의 강력한 부르심’을 받아 아이 갖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셨던 분들 계신가요? 현재 이런 상황에 계신 분께서 질문 보내주셨는데, 저는 그런 경험이 없다 보니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무자녀로 사시는 분이든 아이 갖기를 택하신 분이든, 그때 어떤 고민과 어떤 선택을 하셨는지 그 과정과 감정을 공유해주실 수 있다면 ‘없는 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 페이지에 사연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