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폭풍 같은 두 달 반이 흐르는 동안 드디어 대선이 끝나 새 정부가 업무를 시작했고, 저는...... 논문을 한 학기 더 쓰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지만 어디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 남은 반년 동안 체력을 잘 관리하며 마치는 수밖에요.

평생 가장 체력이 바닥난 상태로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을 위해 고심한 것은 적절한 노동요를 찾는 일이었어요. 사람마다 일할 때 듣는 음악의 취향이 다를 텐데, 제 경우 가사가 들리면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한국어 노래는 듣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신입 기자 시절에는 킨이나 스노우 패트롤의 음악을 끝없이 재생하며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는데, 그 후로 그들의 음악을 듣기만 해도 마감 스트레스가 밀려오더라고요. 지난 몇 년 동안은 일할 때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됐는데, 본격적인 논문 작업에 접어들자 너무 조용한 환경이 오히려 불안해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켜게 되었죠.

이런저런 시도 끝에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음악은 바흐의 피아노곡 독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클래식 지식은 옛날에 듣던 93.1 FM 라디오와 <올훼스의 창>(이 작품을 아시는 분들은 국가건강검진에 암 검진 추가하시고 오십견 조심하시길) 덕질에서 멈추어 있지만, 쇼팽이나 베토벤과는 다른 바흐만의 엄격한 질서와 경건함은 어수선한 정신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더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인데,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70분 가까운 연주 시간 동안 다음 플레이리스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편리합니다. 비록 눈치 없이 씩씩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영롱한 건반음을 멈추고 “유튜브 프리미엄은 광고로 끊기지 않아요!”라고 외칠 때마다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더라도요.

유튜브로 여러 피아니스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영상을 찾아다니며 마주한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의 감상 댓글입니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아랍어, 스페인어...다양한 언어와 함께 박수와 하트, 꽃다발 이모티콘이 쏟아지더군요. 살면서 제가 봐 온 온라인 댓글 창은 대부분 싸움판이었는데, 예술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말하며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모인 광경이 어쩐지 감동적이어서 자꾸만 ‘번역’ 기능을 써보게 됩니다. “Beautiful”이라는 단어 하나도, “あぁ…好き(아...좋아)”라는 한 마디 독백도, “無法言喻的美妙(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라는 정중한 인사도, 그 말을 꼭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느낄 수 있거든요.

알고리즘의 인도로 제 마음에 자리 잡은 연주자는 안드라스 쉬프입니다. 1953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해 활동해온 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흐의 곡을 한 시간 가량 연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저는 백발의 인상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쉬프가 미소를 띠고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을 수없이 들으며 지난 몇 달간 지루함을 견디고 불안함을 다스렸어요. 지칠 땐 같은 음악을 들은 사람들의 댓글을 차례로 눌러 읽어보기도 했고요. 

“나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천국에서는 우리가 바흐의 음악을 많이 듣게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예전의 나는 오직 신, 신의 작품, 원과 구 같은 추상적 개념만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틀렸습니다. 나무와 산과 강이 완벽한 것처럼 바흐의 음악도 완벽합니다. 안드라스 쉬프는 이러한 완벽함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안드라스 쉬프가 바흐를 연주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왜 내가 교회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하고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2007년 항암치료 중에 제 생명과 영혼을 구했습니다.”

“오늘은 그의 70번째 생일입니다. 생일 축하해요, 쉬프 씨, 정말 감사드립니다.”

“안드라스가 바흐를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세상이 좀 더 좋은 곳인 것 같습니다...”

300년 전에 쓰인 곡을 지구 저 멀리에 있는 사람이 연주하고, 수년 뒤 각자 다른 곳에서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순수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꺼내놓는 것을 볼 때마다 저 역시 잠시나마 세상이 생각보다 좋은 곳 같다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쉬프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해 “이 작품의 깊은 인간성과 영성, 낙관주의, 지성의 힘은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바로 와 닿게 말을 걸어온다.”라고 썼는데,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던 2025년 봄에 특히 더 와 닿는 문장이었어요.

이 글이 실린 <안드라스 쉬프 : 음악은 고요로부터>는 그가 음악과 인생에 관해 쓴 글, 음악 저널리스트 마르틴 마이어와의 대화가 담긴 책입니다. 지난 3월 말 쉬프의 내한 연주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쉬워하다 읽어보았는데, 1987년 바이올리니스트 시오카와 유코와 결혼한 그가 무자녀 삶과 음악의 관계를 이야기한 대목을 발견하고 혼자 웃었답니다. 바흐라면 뭐라고 말했을지도 궁금하네요. 

“내게 자녀가 없는 것은 의도한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된 거야. 대가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음악인으로서의 일에 분명 도움이 돼. 나의 자기규율은 특정한 리듬을 필요로 해. 바흐는 그 많은 자녀들이 좁은 집안에서 정신없게 뛰어다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곡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안녕히 계세요.

추신. 지난번 편지에서, 무자녀로 비교적 만족스럽게 생활하다가 삼십 대 후반 이후 ‘유전자의 강력한 부르심’을 받아 아이 갖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셨던 분들에게 경험을 나누어 주시길 부탁드렸죠. 그 후 어떤 결정을 내리셨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혹시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계시다면 ‘없는 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