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도 말려 죽였는걸요, 아이라니요......”

일본 에세이스트 사카이 준코의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민경욱 옮김, 아르테)의 한국판 띠지에 적힌 문장입니다. 2016년 출간 당시 40대 후반의 독신이었던 작가는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 중인 사회의 출산장려 문화 속에서 아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랜만에 이 책을 떠올린 것은 석 달 전 곰곰 님이 보내주신 이야기 때문입니다.

[올해 본격적으로 40대에 진입한 여성입니다. 저는 학생 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지향했고, 지금은 마음 맞는 배우자와 10년 이상 함께 사이좋게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양가 부모님들도 적당히 방어할 만한 정도여서 '손주' 주제로 갈등이 있지도 않고요.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40세에 진입하면서 유전자를 남기고 싶다는 본능이 강하게 발현한다고 해야 할까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생물학적 시계(임신 출산을 위한)가 마감된다고 느껴서 그런 건지 아이를 가지는 문제를 새삼스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진짜 최종 관문은 따로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유전자를 남기고 싶다는 동물적인 충동 하나만으로 이런 마음이 드는 것 같은데요. 나와 나의 싸움이다 보니 상대가 굉장한 강적입니다. 이런 순간이 다른 분들도 찾아오는 건지 궁금한 마음에 질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 곰곰]

“나와 나의 싸움이다 보니 상대가 굉장한 강적입니다”라는 대목에서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심각하게 고민 중이신 게 느껴져 얼른 답장 드리고 싶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선, 비슷한 순간을 맞이하셨던 다른 분의 경험을 전해 드릴게요. 단, 이 글을 보내주신 ‘외노자’ 님께서는 이 이야기가 “개인적으로는 솔직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다소 과격하게” 혹은 “누군가에게는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하셨어요. 저도 우려하시는 지점을 이해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 갖기를 둘러싼 여성의 솔직한 경험과 생각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기에 그대로 담았습니다. 개인의, 자신의 삶에 관한 소회임을 고려하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편지의 말미에 있었던 “유전자의 강력한 부르심”이라는 표현에 홀린 듯, 하던 일을 제쳐두고 메모장을 열었습니다. 저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사람으로, 저 또한 30대의 끝자락에서 무언가에 씌운 듯 1년 가까이 ‘정말 번식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는 유전자의 불호령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순수한 유전자의 부름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에서 입지가 불안했고, 이직은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아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인생의 돌파구를 찾는 데 지쳐 있었죠. 게다가 부모님의 “남들은 카톡 프로필에 손주 사진 올려놓는데, 나는…”이라는 압박도 상당했습니다.

지구상에 마지막까지 딩크를 주장할 사람이 있다면 제 남편일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저는 그런 남편까지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마치 제 실패한 인생이 결국 유전자의 한계 때문이고, 유전자는 이제 저를 포기하고 새로운 개체에 미래를 걸겠다고 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그리고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한 느낌이었고요. 유전자 입장에서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겠지요. 유전자는 그저 자기복제를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니, 더 안전한 개체에서 생존을 도모할 테니까요.

그 후 저는 정말 좋은 조건으로 이직에 성공했고, 새로운 직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바빠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번식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자신에게 집중해서 무언가를 이뤄낼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면 아예 인생을 포기하고 번식을 통해 사회적 생산성의 부족함을 생물학적 생산성으로 메우려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가장 적은 인풋으로 최대의 아웃풋을 내는 것은 번식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요.

지금은 다시 평화로운 딩크의 삶으로 돌아와, 인생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어딘가에 저장해 두고 싶을 정도예요. 마치 저라는 인간이 새롭게 피어난 듯한 기분이고, 이제는 더이상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 외노자]

“유전자의 불호령”이라는 표현에서 또 웃고 말았습니다. ‘유전자’와 ‘본능’은 아이 없는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확고한 무자녀 삶을 사는 사람들도 그와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두 분의 이야기로 실감했거든요. 어쨌든 외노자 님은 유전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군요. 현재의 삶에 만족하신다니 정말 좋은 일입니다. 

사실, 유전자의 부르심을 계기로 아이를 가지신 분들의 경험을 비롯해 다양한 사례에 관해 듣고 싶었는데, 답장을 보내주신 분이 외노자님 뿐이셨어요. 솔직한 경험을 들려주신 외노자 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주실 분들이 있다면 환영합니다.

내 삶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흔 전후의 많은 사람이 그런 부대낌을 겪는 것 같습니다. 아이 없는 여성의 경우 호르몬 변화와 ‘가임기’의 끝이 다가온다는 불안도 작용합니다. 사카이 준코 역시 마흔이 되어갈 무렵, “지금까지 없던”,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아이가 좋은” 감정이 생겼던 경험에 관해 이렇게 고백했죠.

[하복부에서 들려오는 이별 노래와 함께 멀리 사라져가는 출산의 배를 향해 ‘손은 이쪽에서 먼저 흔들었네’ 하고 말하고 싶은 저입니다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일말의 모성 같은 것이 아이가 귀엽단 생각을 하게 한 듯합니다. (중략)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자 아이에 대한 감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출산의 배는 이제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아이를 귀여워했던 마음도 자연스레 소멸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p.28-29]

저 역시 마흔을 막 넘겼을 땐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이대로 살면 안될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외노자 님이 그러셨듯, 나의 생산성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거든요. 손주는 진작에 포기하신 저희 부모님도(다행히 언니의 아이들이 있지만), 아무 일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딸을 계속 못 미더워하셨죠. 그런데도 제 유전자는 생존본능이라곤 없는지, 아이를 갖고 싶다는 바람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대학원에 갔고, 2년 전 쓴 ‘아이 없는 40대와 인생의 의미’는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곰곰 님께서 그 사이 어떤 결정을 내리셨는지, 혹은 아직도 나라는 강적과 맞서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저는 유전자를 남기고 싶다는 충동 또한 나의 일부이자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외노자 님이나 사카이 준코의 경우처럼 상황이 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거나 옅어질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욕망을 계기로 아이 있는 삶을 시작하기도 하잖아요. 결국 선택은 어느 시점의 내가 하는 것이고, 그 시기와 방향이 사람마다 다른 거겠죠. 그러니 아이 없는 삶을 지향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기보다, 지금의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예전에 만나 이야기 나눈 무자녀 여성 중에는 그 후 엄마가 된 분도 계시거든요. 삶은 유동적이고 사람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로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계속 걸어오던, 혹은 새롭게 접어든 길에서 각자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창밖으로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네요. 어느 곳에 계시든 비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추신. 세연 님, 감사합니다. 아이가 있는 분들도 ‘없는 생활’을 즐겁게 읽어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