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가 예쁜 가방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산뜻하면서도 편리한 디자인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곧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멋진 가방에 무엇을 넣어야 할까? 네, 저는 온갖 물건을 다 싸 짊어지고 다니는 바리바리바리스타, 보부상이거든요.

집 밖에서 어지간한 일은 스마트폰과 카드 한 장이면 다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짐이 계속 늘어나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사실 저는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고, 가능하면 무게와 부피를 줄이려고 하는 편인데도요. 하지만 가방을 싸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다 쓸모가 있단 말이죠.

• 에어팟 – 사실상 스마트폰과 한 몸이죠.
• 지갑 – 제 지갑은 언젠가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얻은 검정색 반지갑인데 안쪽에 새겨진 글씨를 보니 어느 공과대학의 기념품입니다. 신용카드, 명함, 주민등록증, 학생증, 도서관 카드와 만 원 정도의 현금을 갖고 다녀요. 노점에서 떡볶이 사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모든 금융시스템이 마비되어 계좌 이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 볼펜 – 없을 때는 꼭 필요해져서 가방마다 하나씩 넣어둡니다.
• 보조배터리 – 제 아이폰 12는 집 밖에 들고 나가면 주인의 체력과 연동되어 급속도로 닳아가기 때문에 종일 배터리 불안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필요합니다.
• 충전기와 케이블 – 보조배터리마저 다 떨어지면 큰일이니까요.
• 손수건 – 물이나 땀을 닦을 때는 물론, 추울 때는 목에 두를 수도 있고 냅킨이나 페이스 커버로도 쓸 수 있다니 손수건이란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저는 대학생 때 첫 해외여행으로 갔던 도쿄 이세탄 백화점 잡화코너에서 만원 안팎에 산 비비안 웨스트우드 손수건을 정말 좋아해서 20년이 훌쩍 넘도록 잘 쓰고 있습니다.
• 티슈 – 손수건과는 또 다른 티슈의 쓸모가 있죠. 공중화장실에 휴지가 없거나 갑자기 콧물이 날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도요. 저는 두껍고 질긴 템포 휴대용 티슈(10매들이)를 좋아하는데, 언젠가 버스 정류장에서 새는 김치통을 안고 계신 아주머니에게 통째로 드리니 무척 고마워하시더라고요.
• 립밤 – 다년간의 여러 시도 끝에 저는 카멕스 스틱(무향)에 정착하였습니다.
• 양치도구 – 어릴 때는 정말 이 닦기를 싫어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는 밥 먹고 바로 이를 안 닦으면 기분이 영 찜찜해지더군요. 그래서 래디어스 여행용 접이식 칫솔과 어딘가의 어메니티로 받았던 일회용 치약, 아마도 약병 뚜껑이었던 것 같은 작은 양치컵을 가지고 다닙니다. 혹시 화장실이 북적여 양치할 상황이 안 될 때를 대비해 테라브레스 일회용 가글도요.
• 사탕 – 산책하다 갑자기 당 떨어져 주저앉은 적이 있거든요. 
• 안경 – 사실 제 짐이 점점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노화입니다. 노안 때문에 폰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는 건 물론, 마트 가격표의 할인 기간처럼 중요한 정보를 읽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얼마 전 작고 소중한 소득세 환급금으로 외출용 돋보기안경을 장만했습니다.
• 복용약 – 역시 노화와 여러 가지 이유로 요즘은 하루에 먹는 알약이 열 개가 넘기 때문에, 외출과 약 먹는 시간이 겹치면 약통을 꼭 챙겨야 합니다.
• 상비약 – 분말형 소화제 오타이산 한 포와 진통제 하나, 요즘 추가된 것은 또! 노화로 인한 안구 건조로 처방받은 인공눈물입니다.
• 물병 – 그거 아세요? 나이를 먹으면 수시로 목을 축여줘야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오지 않더군요. 엄마 가방에 왜 사시사철 물병이 들어 있는 이유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저는 2020년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디자인 공모전 수상작 굿즈로 행사참여자들에게 나누어준 플라스틱 물병을 쓰는데, 얼마 전 친구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어느 텀블러에 대한 예찬을 보고 넋을 빼앗기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결제를 마친 뒤였습니다. ‘오왈라’라는 브랜드인데 추천인 코드에 ‘없는 생활’을...아,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사계절용 소지품이고, 더위를 많이 타는 저에겐 여름용 소지품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 선글라스 – 저는 눈부심이 아주 심해서 맑은 날이면 선글라스 없인 고개도 못 들고 다닙니다. 그런데 선글라스를 끼면 야외에서 폰 화면이 잘 안 보이더군요. 머지않아 중년의 멋을 상징하는 색안경을 끼게 될 것 같아요.
• 모자 – 요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까지는 밀짚모자를 쓰고, 버스나 지하철로 시내에 나갈 땐 작년에 멋쟁이 친구가 준 힙한(저만의 생각일까요) 검정색 뒷밴딩 모자를 씁니다.
• 양산 – 볕이 강한 날은 선글라스나 모자보다도 양산이 최고입니다. 하지만 들고 다니려면 조금 귀찮기 때문에 등에 고정할 수 있는 양산 안쪽의 프로펠러에서 찬 바람이 나오면 좋겠어요.
• 손 선풍기 – 더운 건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얼굴에 가까이 대고 있으면 땀이 조금 덜 나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꽤 거금을 들여 냉각 기능이 있는 제품도 사 보았어요.
• 쿨 스카프 – 칸칸이 나뉘어 길다랗게 포장된 냉매를 얼려서 천으로 된 커버에 넣은 다음 목에 묶으면 녹기 전까지 약 20분 정도는 꽤 시원합니다. 멋쟁이는 더울 때 쪄 죽고 추울 때 얼어 죽는다고 하지만, 저는 지켜야 할 멋이 없는 관계로 다이소에서 산, 대선 기간이었다면 마치 선거운동원처럼 보였을 이 새!파!란! 스카프를 목에 질끈 묶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물건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지가 여름 외출 시의 고충인데요. 엊그제도 큼직한 숄더백을 메고 나갔지만 애초에 가방은 너무 불룩했고, 다이소에 들러 쿨 토시와 쿨 마스크 등 쇼핑한 물건을 잔뜩 쑤셔 넣었더니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양산과 손 선풍기를 드느라 정신 없는 사이 가방 위쪽에 있던 쌀과자 한 봉지를 길에 떨어뜨리고 왔다는 사실을요. 역시 보부상에겐 백팩이 답이고, 예쁜 가방은 보조 가방으로 사용해야겠어요.

이상 저의 왓츠인마이백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방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네요.

안녕히 계세요.

* 추신 1. ‘유전자의 부르심’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어느 무자녀 여성 분께서, 그동안 아이 없는 삶의 가장 친밀한 동료이자 적극적 지지자였던 배우자가 40대 이후 종종 ‘우리에게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라며 흔들리는 상황에 관한 고민을 보내주셨어요. 저를 비롯해 많은 무자녀 여성이 막연히든 구체적으로든 떠올려보는 상황이기도 하죠.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 분은 그 고개를 어떻게 넘어가셨는지, ‘<없는생활>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사연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신 2. 7월 13일 일요일 오후 한 시,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상영하는 프랑스 영화 <발코니의 여자들> GV에 참여합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화가 마리안느를 연기한 배우 노에미 메를랑이 연출, 각본,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어느 여름날 마르세유에서 세 친구에게 일어난 사건을 아주 흥미롭고 과감하게 그린 이야기예요. 저는 무척 재미있게 봤고, 상영 후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를 진행하시는 셀럽 맷 님과 함께 이야기 나눌 예정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오셔서 함께 해요! (예고편 보기)